문화·교육 [서동임의 뮤직라이프] 롯시니 왜 베토벤보다 인기 더 많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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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한 음악평론가 한스 리크가 만년의 롯시니를 찾아가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내 생일이4년에 한번 돌아오는 2월 29일이니 여지껏 생일을 열일곱번 밖에 맞이하지 못했다네, 그러니 열일곱살이 아니고 무언가?” 롯시니는 76년 장수를 누리는 동안 생일을 18번 밖에 맞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러한 일화를 보더라도 익살을 즐기는 타고난 낙천주의자였으며 대식가, 미식가이기도 해서 그의 초상화에서 보는 것처럼 양파를 연상케 하는 전형적인 이태리 뚱뚱보 게으름뱅이였으며 작곡스타일도 유별났다. 장과의 계약기간이 코앞에 닥치도록 오페라 작곡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고급식당에 가서 호식을 하든가 도박을 즐기면서 빈둥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극장주와 흥행가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서는 극장에 감금당한 채 그들의 감시하에 열불나게 작곡하는 것이었다. 원고가 한 장씩 나오는 대로 감시자들이 창 밖으로 던지면 밑에서 대기하던 사보가들이 급히 주워 사보했다. 만약 그렇게 하면서도 마감시한을 못 지키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롯시니가 물으니 감시원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때는 별 수 없지, 원고대신 자네를 창 밖으로 내던질 수 밖에!” 남다른 작곡 스타일 덕분에 그는 상연시간이 약2시간15분이나 되는 <세빌랴의 이발사>를 단13일만에 썼다. 실로 놀라운 역량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전에 다른 가극에 써먹었던 서곡을4탕째 다시 써먹고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선율을 따오고 다른 사람의 오페라 아리아를 슬쩍 하기는 했지만, 노후에도 그는 익살만은 그대로 간직해 파리의 추종자들이 2만 프랑이란 거금을 모아 그의 동상 건립을 건의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돈2만 프랑을 현금으로 나에게 주면 어떻겠소? 그러면 동상 대신 내가 직접 대좌 위에 올라가 서 있을 테니.”
은퇴 후 음식연구가가 된 롯시니는 어느날 오페라작곡을 그만둔다. 그는 윌리엄텔이 대단한 한편의 오페라도 작곡하지 않았는데, 작곡만 하면 막대한 상연료도 받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요리연구에 들어갔다. 이전까지의 미식가 생활이 어느 정도의 취미수준이라면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여러 음식비법을 <알라롯시니>라고 칭했다. 메뉴판에 ‘알라로시니’라는 설명이 적혀있다면 그것이 바로 롯시니가 개발한 방법으로 만든 음식이다. 인생 후반부에 드러난 천부적 요리재능. 서양음식, 특히 오페라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남긴 작곡가이다. 롯시니는 반드시 훌륭한 음식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던 사람이었다. 롯시니는 대단한 미식가였다. 대부분의 미식가들이 그러하듯 직접요리도 했다. 심지어 자신만의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하기도 했으며, 클래식 음악가 중에서 요리메뉴를 개발한 분은 롯시니가 유일하다. 롯시니가 작곡한 오페라들은 모두 큰 사랑을 받았다. 큰 돈도 벌었다. 베토벤과 롯시니는 동시대 음악가였다. 롯시니는 베토벤보다 더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두 대단한 음악가가 같은 날 열었던 연주회에서 베토벤 객석이 절반도 안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롯시니가 만든 오페라의 특징은 바로 웃음이다. 주로 희극오페라를 썼는데 재미있는 이야기와 경쾌한 선율이 함께 흐르는 작품을 만들었다. <윌리엄텔 서곡> <세빌랴의 이발사>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서동임 / 40년 멘토
604.505.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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