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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광대 -가왕 조용필과의 추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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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들끓는 기지촌, 그곳에서 비틀즈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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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과 함께 시작된 그의 음악인생은 미8군 무대로부터 시작된다.  

친구들과 함께’애트킨즈’라는 록밴드를 결성하여 처음 들어간 곳은 경기도 파주군 장팔촌이었다. 그곳에는 미8군을 상대로 하는 나이트클럽이 즐비했다. 

조용필은 친구들과 제일 만만해 보이는 ’DMZ’라는 클럽에 들어갔다. 주인 남자는 무대에 올라가 연주를 해 보라고 했다. 쓸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음날부터 무대를 내줬다.


 조용필은 친구들과 근처에 하숙방을 얻어 놓고 언젠가는 비틀즈 같은 유명한 밴드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주곡 이래야 열댓 곡이 고작인 그들에게 하루 40분씩 5~6회를 올라가야 하는 무대는 너무 벅찼다.

 호기롭게 가출한 친구들이 하나둘 떠났고, 혼자 남은 조용필은 용주골 기지촌으로 갔다. 

그곳의 미군상대 클럽에서 제법 이름이 있던 밴드 ‘파이브 핑거스’의 일원이 됐다. 그러나 조용필의 음악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딴따라’를 막으려는 아버지의 집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전국 방방곡곡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던 아버지가 용주골에 숨어있던 아들을 잡으러 왔다. 집으로 끌려간 조용필은 6개월 동안 삼엄한 감시망 속에서 감금 당하다시피 지내야 했다.


 어느 날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서 도망친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무명밴드의 일원이 되었다. 그가 기타를 치면서 보컬을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보컬을 맡고 있던 친구가 군대에 가는 바람에 그가 노래까지 할 수 밖에 없었다.

 한번은 생일을 맞은 미군 병사가 <리드 미 온 Lead Me On>을 불러 달라고 청했다. 조용필은 밤새 연습을 한 끝에 이 노래를 미군 병사 앞에서 불러 주었다. 

그는 노래를 듣다가 주르륵 문물을 흘렸다. 자신이 불러준 노래를 듣고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면서 조용필은 보컬에도 매력을 느꼈다. 1971년 <리드 미 온> 등을 수록한 앨범을 몇몇 친구들과 발매했으나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앨범은 훗날 대한민국 최고 가수가 된 조용필의 음색이 담긴 첫 번째 앨범으로 기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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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미8군 무대는 매우 중요하다. 그곳은 신중현을 비롯한 작가주의 뮤지션을 탄생시킨 자궁이고, 패티김 등 걸출한 보컬리스트들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조용필 역시 미8군 무대에서 기타 솜씨며 음악에 대한 태도, 보컬의 기본기를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면 끝장을 보는 성미여서 그는 이 시기 동안 많은 음악적 발전을 이루었다.


 미8군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조용필은 당대의 기인 김대환을 만나며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조용필은 김대환. 최이철. 이남이 등과 함께 ‘김트리오’로 활약하며, 보컬리스트가 아닌 기타리스트로 각광을 받는다. 하지만 시간은 길게 가지 못했다. 곧 ‘김트리오’는 해체됐고 조용필은 군에 입대하게 된다.


 김대환은 조용필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많이 미쳤다. 김대환에 얽힌 일화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완벽하게 드럼을 치기 위해 면도칼로 혀를 자르고 창고에 처박혀 1년 반 동안이나 나오지 않고 드럼에 열중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음악에 열중하기 위해 혀까지 자르던 기인 김대환은 특히 조용필에게 가혹했다. 

한번은 김대환이 조용필에게 그 당시 한국에는 몇 대 없던 퍼즈(기타 사운드를 변형시키는 전자용품)를 사줬다. 

조용필이 새로 산 퍼즈를 친구들에게 자랑하다가 연습시간에 늦자 김대환은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했다. 

조용필은 훗날 “그때 대환이 형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도 마음이 편안했다”면서 “누군가 내 음악을 위해 관심을 갖고 채찍질 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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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안긴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수 조용필을 이 땅의 대중들에게 알린 출세작이다. 

원래 이 곡은 김트리오 시절인 1972년 이남이와 통키타로 연주했던 것으로, 2/4박자 트로트 였던 것을 당시의 젊은층이 좋아하는 4/4박자로 편곡했다. 

작곡가인 황선우가 실연의 상처를 겪은 뒤 만든 곡이었다. 레코드 도매상 최동권의 권유로 취입까지 했던 이 노래는 원래 가사가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가 아닌 ‘님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였다.


1976년 군에서 제대한 조용필에게 킹레코드사 박성배 사장이 연락 해 왔다. 

그 당시 조용필은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밴드를 만들어 미8군 무대에서 벗어나 부산 등지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박성배 사장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타이틀 곡으로 한 독집 앨범을 내자고 제안했다.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제작자이자 프로모터였다. 지구레코드 등 유명한 음반제작사들이 있었지만 ‘킹박’으로 불리던 그는 실력 있는 신인을 발굴하고 그들을 스타로 만드는데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님 떠난’에서 ‘형제 떠난’으로 가사가 바뀌고, 처음 발표할 때와 달리 크게 히트한 배경에는 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재일교포 모국 방문단이 큰 역할을 했다. 

 70년대 남북은 극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 잇는 재일교포들은 민단과 조총련계로 나뉘어 극한 대립관계에 있었다. 

때마침 광복절 행사장에서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의 총에 맞아 육영수 여사가 절명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가 유화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모국방문 추진이었다. 

모국 방문단은 포항제철을 비롯해 울산공단, 구로공단, 부천공단, 창원산업단지 등 조국 근대화의 현장을 두루 돌아 보면서 ‘한강의 기적’을 눈으로 확인했다.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 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혀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2절 가사는 마치 제일교포 모국방문단을 위해 만든 노래 같았다. 이 노래가 방송에서 흘러 나왔고, 부산을 시작으로 전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노래가 됐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철저하게 무명밴드의 일원으로 떠돌았던 조용필에게도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서광이 부메랑이 되어 암흑천지의 악몽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의 이름 석자가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릴 즈음 ‘조용필이 대마초 가수였다’는 투서가 날아 들었다. 조용필과 대마초 사건, 그가 이제 막 날개 짓을 시작하려는 순간 조용필의 발목을 잡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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