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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의 삶과 역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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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도 인정 못한 ‘미군 병사와 한인 여성 간 국제결혼’


한국전쟁과 전쟁신부의 역사

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코리아월드(발행인 Phil 양)는 마침 미주이민 12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미주한인 동포사회의 발전과 도전 1903-1923>에 소개된 ‘국제결혼으로 미주에 진출한 한인여성들의 역사’를 접하게 됐다.
필자인 정 나오미(미국 알칸사한인회장)씨의 승락을 받고 이 글을 정리해 코리아월드 단독으로 ‘[특별기고] 미주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의 삶과 역사’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지난호에 이어서>

1950년대 한국인의 미국이민 배경에는 미 군정과 6.25전쟁이 가장 큰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6.25전 이후 4만 명의 주한미군이 경기도를 비롯하여 남한 일대에 주둔하게 되었다. 인류학자인 이광규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그 참상이 극에 달했으며, 전쟁 후에도 흉년과 기근으로 미국의 원조 없이는 궁핍하고 가난에 허덕여야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미군부대 주변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당시 미군부대는 용산 8군 육군기지, 경기도 동두천의 캠프 케이시 육군기지, 경기도 의정부시 캠프 레드 클라우드 육군기지, 경기도 평택의 오산 공군기지, 전북 군산의 군산공군기지, 부산의 캠프 히알레야 군수기지, 대구시 캠프 와커와 캠프 헨리 공군기지, 경북 왜관의 캠프 카로프 등이며, 미군부대 안에서의 다양하고 많은 일자리를 서로 가지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은 50만 명 이상의 전쟁미망인들과 부상 당한 남편을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수많은 여성은 남성들처럼 자연스럽게 미군부대 안팎과 인근에서 장사를 하거나 종업원으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부대 안에서 여러 분야, 특히 전화교환원, 사령관 비서, 각종 오피스 직원, 식당 웨이트리스, 은행원, PX 점원, 미장원, 우체국 등등 미군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한국 여성들이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 간의 교제가 늘어나고 국제결혼이 서서히 증가해 갔다.

 멸시와 천대의 손가락질 견뎌내
대표적인 국제결혼 제1호 한국 여성은 영순 모건(한국명: 이영순, 미국 별명: 블루)으로 미군부대 전화교환원이었다. 그 뒤를 이어 대학을 다니다가 미국대사관 직원의 청혼으로 결혼한 전 에드워드(한국명: 송전기)를 비롯하여 한국전쟁 중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다수의 한국 여성들(전 도우슨과 피자 크림션 포함)이 미군 병사의 청혼을 받고 국제결혼을 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지속되자, 유엔군(대부분 미군)들이 파견되면서 미군과 한국인 여성들의 국제결혼은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미군 병사들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을 한국인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은 누구 하나 자기의 개인 영달을 위한 사람은 없었다.

전쟁 전후의 혼란, 경제 파탄으로 가난한 상황에서 가족 전체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혹은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부상 당한 남편을 대신하여 생계유지를 위하여, 가난한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미군과 국제결혼을 했고, 한국인들의 멸시와 천대의 손가락질을 견뎌냈다.
이렇듯 초기의 국제결혼은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배경 때문에 이루어졌지만, 불행히도 이들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와 미주 한인사회의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선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이들을 고립시키고 격리해 왔다. 이민 2단계(1945~1964) 초기 국제결혼 한인여성의 심리적 고충은 한국인의 편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군 병사와 한인 여성 간의 국제결혼이 미국 정부의 인정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군 병사 신부법(GI Bride Act)과 전쟁 신부법(War Bride Act)이 생겨나면서 미군 병사와 결혼한 한국 여성이 미국인의 아내로 인정받았고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신부법은 원래 세계 2차 대전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들의 결혼 미망인들과 자녀들의 미국 입국과 일정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1946년 미국의회가 쿼터와 관계없이 제정한 특별법이다.

1947년에는 이 법을 수정하여 중국을 비롯한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여성들이 전쟁 신부의 명목으로 미국 시민이 허가되었다. 이 시기 국제결혼한 미주 한인여성들(대부분의 미국 군인 부인들)의 미국 이민생활은 언어장벽, 문화 차이, 인종차별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히, 미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미군 부인들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불문하고 미군들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차별하고 경시당했다.
이들은 ‘양OO’라고 부르던 한국인들의 편견으로, 이미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들의 초기 미국 입국은 미국 군함을 타고 워싱턴주의 시애틀 항구를 거치거나 일본에서 군용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를 거쳐 미국 전역에 흩어져 형성되어 있던 700곳이 넘는 남편들의 군 복무지나 고향에 도착했다.

미국 50개 주 전역에 그물망처럼 형성되어 위치한 700여 군사기지는 대도시에서 떨어진 곳으로 시골이나 소도시로 한국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다. 이런 지역에 혈혈단신으로 남편만을 의지하며 고향을 떠나온 이들은 외롭고 힘든 이민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불편 없이 영어를 알아듣던 여성들도 미국에 오니,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힘들었다.

영어로 소통이 되지 않으니 식품을 사기 위한 쇼핑도, 자동차 운전도 할 줄 몰라 남편이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국 음식을 먹을 곳도 없고, 이것을 하소연할 만한 한국 사람도 가까이에 없었다. 고향 친정 식구나 친구에게 전화할 수도 없었다. 그저 울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이를 악물며 미국 생활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또 부부갈등도 늘어갔다. 한국에서는 서투른 영어 실력에도 남편과의 소통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는데 일상생활을 모두 영어로 사용하다 보니 부부갈등이 늘었고, 한국에서는 군인 남편의 월급으로도 불편 없이 살았는데(미군 PX에서 싼값으로 구매한 물품을 마마상을 통해 팔면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하는 도우미를 둘 만큼 여유가 있었고, 친정 식구들에게도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미국에 와보니 계급이 낮은 젊은 남편의 월급으로는 생계를 꾸려가는데 어려움이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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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나오미(Rev. Dr. Naomi Rogers)

★알칸사주 미국연합감리교 목사
★알칸사주 22회 Silver Haired Legislator(은발주의원)
★알칸사한인회 13대 회장
★월드킴와(World-KIMWA, 세계국제결혼 여성총연합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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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an님의 댓글

sw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나오미씨의 기고문을 읽고 느낀 바가 많습니다  우리 이민역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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