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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인터뷰] 한인사회에 ‘희망’을 선물한 임용근 전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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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인터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시각부터 바로잡아야“

실패와 고난 이기고 한인사회에 ‘희망’을 선물한 임용근 전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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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기자는 작년 10월 애틀랜타 한인회관 건립행사(애틀랜타 한인교회)를 관심있게 지켜보던 중 임용근 전 오리건주 상원의원(사진)을 처음 알게 됐다. 오리건주 상원의원 3선의원과 하원의원 2선을 했던 임용근 전 의원이 참석했던 자리에는 김남수 이승만기념사업회미주총회장과 오영국 한미연합회 중남부 총회장도 함께 했었다.

오는 17일 임용근 전의원은 달라스(Hampton Inn conference Room)에서 '버려진 돌'이란 제목의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실시한다. 이승만 고국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텍사스대회 일환으로 거행되는 출판기념회를 일주일 앞두고 기자는 임 의원과 전화인터뷰를 가졌다. 

서먹했던 첫 만남과 달리 전화 대담을 나눠가졌던 1시간 반동안 정치생활을 떠난 지 18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주류사회와 한인사회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그의 실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서 가슴이 꽉 차는 기분이 들었다. <대담=임용위 기자>       


Q 작년 10월 애틀랜타 한인교회에서 강연했던 의원님의 ‘이승만과 한미동맹’이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을 설명했던 의원님 방식의 내용에 크게 고무됐다. 다시한번 상기시켜줄 수 있는가?

"먼저 당시 이승만 건국 대통령 동상 건립 대회장을 맡은 주중광 한미연합회(AKUS) 애틀랜타지회 이사장에게 감사말씀을 전하고 싶다. 무엇보다 건립기금 30만불을 마련해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동상과 맥아더 장군 동상이 함께 건립하는 계획을 수립하게 된 점이 반가웠던 행사였다. 결국은 우리 세대가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다. 동상 건립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당시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학업을 한 인재로 미국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70주년 한미동맹의 시작은 이승만에서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굳건한 동맹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한국 내 역사적 평가가 정파에 따라 치우쳐져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그의 공과(功過)는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소위 진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람들이 ‘친일 인사’ ‘미국의 앞잡이’ ‘분단의 원흉’ ‘전쟁 때 도주’ 등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몇가지 주장을 멈추지 않는데 이 모두가 당시 상황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았거나 역사적 진실의 일부분만 담고 있는 왜곡일 뿐이며, 이로 인해 후손들에게 이미 드러난 객관적 사실들까지도 손쉽게 반박되고 있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 수많은 변수와 위협 조건들이 엄존했던 상황에서도 이 전 대통령이 나라를 제대로 이끈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인생에는 집권 연장 등 결점도 있었지만, 조국을 위해 희생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자유주의 개혁을 옹호한 점, 한국 독립운동을 위한 집념,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달성, 농지 개혁 등은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존경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들이며,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은 현대 한국 사회와 한·미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복합적 인물’로 정의내려져야 한다고 보는 게 맞다." 


Q 후손들에게 곡해되는것이 안타깝다고 했는데, 당장 기성세대들이 어떠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까?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시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이한 이 즈음이 이 대통령을 역사적으로 제대로 복원시키는 가장 주요적절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입각한 사료에 기초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하기에 정치적 이해관계나 잣대를 통해 일방적인 정치공세를 취하는 오류는 극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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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임용근 전 미국 오리건주 상원의원이 자서전 출간 기자간담회 후 부인 임영희 씨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Q 이승만 대통령에게 유독 ‘친일(親日)’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데?

“이승만을 ‘친일’로 규정할 명분(justification)이 없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하에 둘 것을 주장했다. 이는 일본 통치의 영구화가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조기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강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승만과 일본은 매번 충돌했다. 그는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지속적으로 저항했고, 일본에 이익이 되는 미국의 정책엔 사사건건 반대했다. 그런 사람에게 왜 친일 딱지를 붙이는가. 어불성설이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에 관헤 강연할 때 청중들에게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정당한 근거를 갖고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말해왔다. 한국 일각에선 이승만이 한국의 대일(對日) 테러 활동을 비판한 것, 일제 청산때 ‘일본과의 협력’의 정의를 좁게 정의한 것 등 을 두고 ‘친일’이라고 규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런 결정들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최선의 정책’이라고 믿었다. 그의 정책들이 효과적이었는지, 그가 추구했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됐는 지에 대해선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의도까지 ‘친일’이라고 하는 건 사실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다.”


 Q 이승만이 ‘미국의 꼭두각시’였다고는 주장도 있다. 역시 진보주의자들의 시각이다. 심지어 '미국의 국가 이익만 따라가고 조국은 내팽개쳤다'는 목소리도 들리는데?

“왜곡이다. 솔직히 어떻게 그런 인식이 가능한 지 모르겠다. 그를 미국의 ‘앞잡이’(stooge) ‘꼭두각시’(puppet)라고 부르는 건 북한, 중국 당국이 만든 문서 외엔 본 적이 없다. 그는 미국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미국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의 목적을 위해 미국의 입안자들을 효과적으로 휘두르기도(manipulate) 했다.


그는 정권 초기부터 미국이 반대했던 대한민국에 의한 무력 통일을 주장해왔다. 심지어 1954년에는 전쟁 재개를 옹호하는 의회 연설을 해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남한만을 위한 경제 계획을 세우라는 미국의 압력에도 시간을 끌었던 것은 통일을 간절히 원했고, 가까운 장래에 통일이 이뤄질 것 같지 않다는 신호를 한국 국민들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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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오리건주 역사박물관 외벽에 그려진 임용근 전 오리건주 상원의원의 얼굴


Q 6·25 전쟁 발발 뒤 이승만 대통령이 도망갔다는 주장이 일각에 퍼져있기도 한데?

“6·25 전쟁 당시 주한미대사관의 해롤드 노블 1등서기관이 쓴 ‘전쟁 중인 대사관(Embassy at war)’을 보면 이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피신하다가 대전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여기서 죽겠다’고 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돼 부산까지 내려갔을 때도 미측은 ‘일본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절대 안된다, 죽어도 한반도에서 죽겠다’고 발언한 부분이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 일기에서도 그가 부산까지 대피하지 않고 버티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불안감이 잘 나와있다. 이를 도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러시아의 침공에도 우크라이나에 남아있었던 젤렌스키와 이승만을 비교하는 경우도 있던데, 당시 군사적 상황은 한국과는 너무나도 다른 상황이었다. 이 전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있었다면 생포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도주한건 김일성 아닌가. 그는 인천상륙작전 다음 달인 10월 한국과 UN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강계시 동굴로 도망쳤었다.”


Q 역시 일각의 논리인데, 이 전 대통령이 ‘분단의 원흉’ 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이승만은 한반도를 미·소가 분할 점령하는 데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었다. 일단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 열강의 결정과 책임에 따른 것이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추진은 소련과 북한 김일성이 공산화를 이미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까지 공산화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의도였다. 


‘이승만이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한국 내 좌파 세력의 비판 중 가장 큰 문제는 그럼 대안이 무엇이냐는 데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에서 권력을 잡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 지 말이다. 


당시 국제적 맥락을 살피는 게 중요하다. 당시 미·소간 협상도 지지부진했고,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를 실시해 좌파 리더가 당선되는 것을 허용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이승만은 결코 통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3년 이후 그는 북진 통일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면서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 정도였다.


결국 임시 정부 실패의 주 요인은 미국이었지 이승만 때문이 아니다. 미국은 임시정부안을 반대했다. 미 군정청의 하지 사령관이 임시정부를 찬성하고 한국에서 미국이 떠나자는 제안도 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수석 고문이었던 미국인 로버트 올리버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공산주의란 마치 전염병인 콜레라와도 같아서 박멸해야 하는 것이지, 어르고 달래며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한반도 독립의 대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내일이라도 엉클 조(소련 스탈린의 별명)와 손을 잡겠지만, 이는 대의를 거스르는 것이기에 그러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다. 38도 이북에 공산주의를 남겨놓고선 진정한 통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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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서 미국 오리건주 상·하원 5선까지


Q 한미동맹 얘길 해보자. 강연에서 강조하는 바도 늘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거론한다. 

 “6.25 전쟁에 미국이 참전해 20대 젊은 군인 3만7천여명이 전사했고 10만여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아직도 7천여명의 실종자가 있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후세대에 올바른 역사를 알려줘야 한다. 이 한가지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온 국민이 알다시피 한반도에서 북한의 전쟁 재발을 억제하기 위하여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과 논의한 결과 '한미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체결되어 한미동맹관계는 법적·국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조약은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조인되었고,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정식 조인되었으며, 양국 국회의 비준을 거쳐 1954년 11월 18일부로 발효되었다.  


이제 한미동맹은 군사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를 포괄하는 ‘포괄적·역동적·호혜적 동맹관계’로 발전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북한이 통일의 선결조건으로 미군철수를 제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사회 일각에서도 즉각적인 미군철수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안보의 불안요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미동맹을 맹신해 스스로의 국가안보를 소홀히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한미동맹 무용론은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무지의 소산이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고 본다”

 

Q 이제 화제를 바꿔보자. 의원님은 한인 정계 도전사에서 주춧돌을 세우신 분이다. 오리건 주상원 3선과 주하원 2선을 합쳐 통산 5선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힘든 고난의 이민환경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경기도 여주 시골에서 자라난(1935년 출생)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하기조차 불가능했다. 17살부터는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는 등 7년여 투병생활을 하는 와중에 정신 이상자로 몰리는 고통도 당했다. 하지만 가장 큰 아픔은 아버지가 6.25전쟁 때 공산당으로 몰려 남한 정부에 총살당하면서, 온 가족이 빨갱이 가족이란 딱지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1966년 6월에 빈털털이 무일푼으로 미국에 와서는 청소부, 정원사, 세탁일, 페인팅 등 온갖 궂은 일을 해야했고 고교시절에는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미군들의 구두를 닦는 등 온갖 고생도 마다 안했다. 그렇지만 나는 늘 마음 속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내야겠다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16년간 오리건 주의회를 장악하는 결실을 거뒀고 당시 현지언론들이 '주 의회를 주름잡았던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과분한 평가를 내려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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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첫 정계 도전이 오리건 주지사 선거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90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한인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됐다'는 일화도 들었다. 주류사회에서는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래봤자 미국 교회 교인과 가족, 친지를 합해 100여명에 불과했다. 주지사 선거 기간 중 한 유명단체에서 주최한 후보들의 정견 발표가 있었는데, 후보자들의 초청 명단에서도 아예 이름조차 오르지가 않았다. 마땅히 주최측에 항의했더니 10명의 지지 서명을 받아오라고 하더라. 아마 주최측에서도 '10명의 서명을 받기도 힘들다'고 장담했던 모양이었다. (씁쓰레한 웃음)


그러나 선거 결과는 공화당 예선에 출마한 7명의 후보 중 2위로 나타났다.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웃음거리였던 나는 주지사 출마 덕분에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그 이후로 돈키호테였던 나는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주상원 의원을 3차례 역임했고, 2005년부터 2009년 사이 주하원 선거에 두차례 당선됐다." 


Q 오는 17일 달라스에서 임 의원님의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생이야기 '버려진 돌'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청소부에서 미주 한인 사상 최초로 미국 오리건주 상하원 5선까지 성공신화를 쓴 '버려진 돌 임용근 스토리'는 기자에게도 미국에 사는 한인 차세대들에게 '필독서'로 권장하고 있는데?

"무일푼으로 도미해 경제적인 성공은 물론 한인 이민 사상 최초로 오리건주 상하원 5선을 할 정도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은 결코 성공비결이 아닌 내 자신이 겪었던 많은 실패와 고난과 시련들이다. 지금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소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고, 나아가 한인들을 도와줄 한인 정치인들이 더 많이 탄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판기념회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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