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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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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는 그 동안 자서전이란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나 위대하고 유명한 사람들만 쓰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몇 년 전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조카들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큰 관심을 보이며 자서전을 써서 젊은 세대와 나눌 것을 격려하고 권장했다. 또한, 내 주변의 젊은이들에게서 나와 내 아내처럼 늙고 싶다는, 늙어서도 우리처럼 건강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싶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던 터였다. 그들의 권유와 자극은, 내 삶과 내가 살아오면서 터득한 깨달음들을 나누고 싶다는 가슴속 열망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자서전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고민하다가, 어느 날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성공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성공한 것인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도달하면 성공한 것인가?” 

살아오면서 극도의 가난에 처하기도 하고 부유한 삶을 누려보기도 하고, 하우스보이 노릇도 해보고 성공의 사다리를 밟아 높은 지위에 올라보기도 하고, 최고의 권력을 소유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기업가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85년간의 경험들에 비추어보니, 부와 명예, 권력과 성공이란 개념은 모두 허상이요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진실하게 인생을 살아온 자라면 누구든지 성공한 자요, 충분히 자서전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이만큼 운이 좋거나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했음을 자랑하고 박수 받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얻은 진실한 깨달음들을 타인들이나 젊은 세대들과 공유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수도 잘못도 상처도 회한도 모두 솔직하게 녹여서 쓸 수밖에 없다.  


내 재능과 노력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수많은 축복과 은혜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나로 하여금 게으르거나 실망하지 않고, 인내하며,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음을 확신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태어날 때부터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에 온 이후 여러 가지 혹독한 어려움과 역경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단련이 되었고, 그로 인해 이전보다 강인하고 건강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이 나라에 왔을 당시, 아버지는 내게 미국에서 공학도로서 탄탄한 일자리를 얻고, 좋은 아내를 맞이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리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는 이미 오래 전에 다 이루었다. 내 목표와 성취가 다른 이들에게, 특히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신실하게 최선을 다한 것, 그리고 한 가지 목표를 성취하면 거기서 중단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도전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나이에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내 자서전을 읽음으로써 젊은 세대가 좋은 영향을 받아 생각의 변화를 이루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라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꿈에 도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수확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소망이야말로 나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준다. 


이렇게 글을 많이 쓴 것은 내 일생 처음이다. 이번 경험을 통해 글 쓰는 일이 거대한 작업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글을 쓰면서 정신과 체력이 소진되는 것을 느꼈지만, 동시에 뇌가 온전히 활성화되어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던 지난 시간들을 지치지도 않고 불러오는 것을 보며 경이를 느꼈다. 게다가 그 기억을 불러오는 동안 나는 다시 젊어지고, 오랫동안 뵙지 못한 나의 어머니, 외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체험한 인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얼마나 수많은 사랑과 희생이 나를 지켜주었는지를 새삼 깨닫고 무한히 감사하게 되었다. 그렇다. 이 글쓰기는 결국 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이 책을 바친다.



I.북한에서 

1. 평양 출생과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 명가촌의 장손 명재억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독자적인 권한이 박탈된 일본 제국의 영토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킨 후, 중화민국을 비롯한 대륙으로의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일제의 중국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보급창고로 전락했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일제는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제거하여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민족 말살 통치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나는 1932년 12월 2일 평양의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명재억, 어머니는 전봉란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 나의 친할아버지 명은조는 평양에서 대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마일 떨어진 청룡이라는 마을에서 제법 큰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대대로 명가 자손들이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 마을은 또한 ‘명가촌’이라고도 불렸다. 아담한 언덕 아래로 대동강 줄기가 평화롭게 흘러가고, 강가 양지 바른 곳에 형성된 마을에는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마을 북쪽의 우거진 숲에서는 나무 사이로 자주 노루 가족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강물에는 물고기들이 풍부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대동강 기슭에서 대대로 쌀과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런데 미국 선교사들이 들여온 땅콩을 먹어보고, 땅콩 농사에 대해 알게 된 나의 증조 할머니께서는 모래사장으로 뒤덮인 대동강 기슭의 토양과 기후가 땅콩농사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셨다. 게다가 모심기부터 추수와 탈곡까지 노동력과 시간이 많이 드는 쌀농사에 비하면 땅콩농사는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여장부였던 나의 증조 할머니께서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땅콩 종자를 들여 온 다음, 그 마을 최초로 땅콩밭을 만들고 땅콩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 땅콩 한 말 가격이 쌀 한 말 가격과 같았기에, 증조 할머니는 땅콩 농사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나셨던 증조 할머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와 돼지 등 가축들을 들여와서 키우기 시작했고, 사슴 농장도 만드셨다. 사슴농장에서 채취한 녹용들은 비싼 한약재료로 판매하여 큰 수익을 올리셨다. 증조 할머니는 진정 시대를 앞서 간 여성 사업가였다. 명가촌에서 증조할머니의 위상은 여황제와 같았고, 아들들은 절대적으로 어머니의 말씀에 복종했다. 

나의 아버지 명재억은 증조 할머니의 맏아들인 명은조 할아버지의 네 아들 중 장자였다. 전통에 따라 할아버지의 땅과 가업을 물려받아 부유한 지주의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태어난 땅에서 평생 농부로 사는 것에 관심이 없으셨다. 대신 대학교육을 받아 농업과 관련된 전문지식을 습득한 후 한국의 농업기술을 향상시키고 농부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꿈꾸셨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자, 아버지는 열세 살의 나이에 가족들 몰래 집을 나와 정주로 떠나셨다고 한다. 그곳에 있는 오산학교에서 수학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내려야 할 역을 놓친 바람에 10마일이 넘는 거리를 다시 헤매며 걸어가던 일에 대해 뒷날 나에게 여러 번 들려주셨다. 한번도 밥을 굶어본 적 없는 지주의 아들에게, 추위와 배고픔과 어둠 속에서 걸어가던 그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덕분에 아버지는 안전한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처음으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결국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평안북도 정주시에 도착하여 오산학교에 입학하실 수 있었다. 
오산학교가 있던 정주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교육도시로, 수많은 유명한 교육자들, 목사들,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나의 아버지는 오산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아버지는 오산학교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에게 자신이 청룡시의 지주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자기가 오산학교를 찾아온 이유를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의 숙박과 학비 문제를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는 졸업하자마자 돈을 모두 갚기로 약속했다. 

아버지는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진 않으셨다. 그는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가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하고 싶었다. 그는 일본으로 날아가서 동경대학에서 농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미국과는 달리 당시 일본에서는 대학생이 학비를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별로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의 숙부 중 한 분이 약간이나마 학비를 보내주셔서 그 돈으로 빠듯하게 생활해야 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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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인성 박사 
작가소개 
1932년 평양에서 태어난 명인성 박사는 1948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광업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을 졸업했다. 미국 Raytheon Corporation의 자회사인 Seismograph Service Corporation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털사 대학교(University of Tulsa)에서 석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대한민국 포항의 유전개발 프로젝트와 북한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 중국과 남미 등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민간 외교와 사회사업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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