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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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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중에 남한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함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인성아, 미국에 가거든 각별히 조심해야 된다. 미국이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지고 있는지 몰라도 영적 문화는 확실히 퇴보하고 있다. 그러니 오로지 과학과 기술을 배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영적 문화는 배우지 말거라. 그 속에 깊이 빠져들다간 너마저 영혼을 잃을까 봐 걱정이구나.”

함 선생님의 조언은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내 아버지의 동창이었지만, 내 부모님은 함선생님의 지성과 영적 통찰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함 선생님을 소련군 감옥에서 빼내고 남한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과 목숨까지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부모님의 판단은 정확했다. 함 선생님은 이후 한국의 영적 지도자, 민중의 봉사자, 교육가, 사상가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의 간디”로 일컬어졌고, 두 번씩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1. 북한 탈출 계획과 작별


누가 먼저 떠날 것인가


어머니는 함석헌 선생님을 남한으로 탈출시킨 직후, 같은 가이드와 경로를 활용하여 아버지를 탈출시키기로 작정하셨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게 진행되었지만, 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밀한 것까지 계획을 세워두었으므로 흔들림이 없었다. 탈출은 밤에 이뤄지므로 밤이 길수록 유리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닷물을 통해야 하므로 너무 추운 겨울은 피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봄이 가장 적당한 시기였고, 그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함선생님 때는 해주까지 따라가지 않으셨는데, 아버지가 가실 때는 어머니도 함께 가셨다. 해주역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후, 근처 여관에서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무사히 남한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으면 집으로 돌아오시기로 했다. 나를 포함해서 다른 가족들을 차례로 탈출시키려면 어머니가 직접 경로를 답사하며 여러 가지 돌발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은 너무나 긴장된 순간의 연속이었기에 모든 것이 더욱 세세하고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인성아, 이젠 네 차례다!”

막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하신 말씀이었다. 어머니는 품에서 반쪽자리 신문지를 꺼내 펼쳐 보이셨다. 아버지가 평양을 떠나시던 날 아침, 엄마가 아버지 품에 고이 접어 넣어준 그 날짜 신문이었다. 아버지를 남한 땅까지 데려다 준 가이드가 아버지에게 받아서 어머니에게 최종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그걸 받아 들고 나서야 어머니는 비로소 안도하며 나머지 비용을 치른 것이다. 


며칠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가족들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이느라 애간장이 다 타버릴 지경이었는데, 어머니는 그 동안 잘 지냈냐는 안부도 묻기 전에 나를 떠나 보낼 생각부터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얼굴은 수척했고 흰머리가 눈에 띠게 늘어나 있었다.  아버지를 보내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긴장과 피로에 절은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묻지도 반박하지도 않고 “네” 라고만 대답했다. 어머니에게 나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의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가 가장 걱정한 건 나의 안위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세운 계획에 의해 함석헌 선생님을 무사히 남한으로 탈출시킴으로써 능력을 증명해 보였지만, 아버지는 오랫동안 머뭇거리셨다. 어차피 온 가족이 한꺼번에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고 운이 나쁘면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각오해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걱정하는 문제들에 대해 하나하나 해답을 제시했고, 안전하고 효율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어머니는 얼마 전 함석헌 선생님의 탈출을 도운 노련한 농부를 신뢰하고 계셨다. 비록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우리 가족 전체의 탈출을 위해 농부에게 제시한 금액은 배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원래 정치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던 어머니는, 만약 농부가 어머니를 배반할 경우 그에게 일어날 손해를 암시함으로써 확실한 안전장치도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미모와 지력과 배짱을 생각할 때, 만약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세계 지도를 바꾸고도 남았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가족을 몇 그룹으로 나눠서 어떤 순서로 탈출시킬 것인가였다. 그 문제로 몇 주 동안이나 밤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의논하는 소리를 들었다.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어머니가 흐느끼실 때도 있었지만, 나는 모른척해야만 했다. 이미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어머니의 계획이 온 가족을 모두 탈출시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평양에서 단동으로, 단동에서 평양으로 떠난 경험이 있었으니 떠나는 일이 조금은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사실은 점점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머리가 더 컸고, 더 많은 관계들과 추억들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아직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떠날 준비가 되어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대 상황은 나에게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보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가족은 늘 함께 있겠지만 친구들은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생사가 걸린 시점에서 우정을 운운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나를 못마땅해하셨다. “넌 어쩌면 그렇게 나를 안 닮았니!”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셨다. “내가 차라리 아들을 하나 더 낳고 말지!” 그 말씀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끝내 이루지는 못하셨다. 결국 가족 중에서는 아버지가 먼저 탈출하시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고, 아버지가 무사히 탈출했다는 증표를 얻은 후에서야 그 농부를 믿고 나를 보내는 걸로 합의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탈출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숙부의 집에 머물게 할 계획이셨다. 혹시라도 북한 비밀정보부에서 당시 북한 정부의 농업부 장관이던 아버지의 탈출 사실을 알아낼 경우, 당장 우리 집을 덮쳐 쑥대밭을 만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곧 숙부의 집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셨다. 숙부가 공산당원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신뢰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생각하신 대안은 나를 어머니와 같은 교회에 다니시던 권사님 댁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분은 신앙심이 깊은 분이셨고, 남편을 잃고 혼자 된 후로 교회 사옥에 살고 계셨다. 나는 그 권사님의 집에 머무르면서, 의심을 피하기 위해 탈출 바로 전날까지 학교에 출석했다.  


진실한 우정에 목숨 걸다


평양에서 보낸 그 마지막 일주일 동안, 나는 평소 각별히 친하게 지냈던 여섯 명의 친구들과 매일 만났다. 우리 일곱 명 친구들은 거의 비밀이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기에 내가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 친구들은 함께 기계체조를 연습하면서 친해진 사이였는데, 기계체조 선생도 없던 시절에 우리는 온갖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서로를 가르쳤다. 그러고는 다른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기계체조 팀 들이 참여한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이나 유튜브나 샤워시설이 갖춰진 체육관도 없던 시절, 우리는 러시아, 일본, 독일의 기계체조 선수들의 올림픽 시합 장면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갔다. 여러 번 반복하여 시청하면서 노트에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그린 노트들을 모아 그들의 테크닉과 동작들을 철저히 연구했다. 이제 방법은 알겠는데 연습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하는 게 문제였다. 푹신하고 넓다란 매트리스도 없으니 철봉에서 회전한 후 잘못 뛰어내리다가는 머리나 허리를 다치기 십상이었다. 그때 평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데다 담력이 뛰어나서 우리의 리더 역할을 하던 주재덕이 제안을 했다. 


“해변가에 철봉을 박고 물속으로 뛰어내리면 어떨까?” 

우리는 당장 재덕의 의견에 동의했고, 철봉을 떼어 메고 대동강 한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배를 타고 갔다. 그곳 해변가 모래 사장에 철봉을 설치해놓고, 영화에서 본 장면을 상기하며 연습을 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 서로를 격려하며 강훈련을 하는 동안, 우리는 기쁨과 슬픔을 모두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다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운동만 하는 학생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공부도 썩 잘 하는 엘리트들이어서 같은 선생님에게 영어와 수학 과외를 받기도 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북한 정부는 학교 제도를 소련 식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당시 평양에는 중학교가 다섯 개였지만 고등학교는 단 하나 평양고등학교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만 대학에 갈 자격이 주어졌고, 나머지는 기술자나 하급 노동자 교육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매우 어려운 입학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내가 중국 단동에서 평양으로 이사 오면서 들어간 학교가 광성 중학교였고, 거기서 우리의 기계체조팀이 결성되었는데, 놀랍게도 우리 팀원 전체가 평양 고등학교의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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