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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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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위험한 비밀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하루 하루 시간은 빨리도 지나갔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배반하여 이 사실을 학생 위원에게 알린다면 우리 가족의 계획은 산산조각 나고, 나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내질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순수한 시절의 나에게는 ‘우정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전적인 믿음이 있었다. 마침내 하루는 용기를 내어 친구들에게 고백했다.  


“나 며칠 후에 남한으로 떠나야 해. 이제 다시는 너희들과 못 만날지도 몰라.”

친구들은 너무나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곧 눈시울을 붉혔다. 나도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입술을 타고 입 속으로 스며들었다.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우리 집 사정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부둥켜 안고 울면서, 나는 내 평생 다시 이만한 우정을 가질 수 있을지 의심했다. 친구들은 이별 파티를 열어주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하루 날을 잡아 모두 학교를 결석하고 모란봉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친구들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노래와 시와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주었고, 공원에서 나온 후에는 근처 사진관에 가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내가 떠나는 날까지 비밀을 지켜줄 것을 맹세했다. 


권선생님께 비밀을 누설하다


놀랍게도 나의 순진한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내가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하던 어른이 한 분 계셨으니, 바로 내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시던 ‘권선생님’이다. 안타깝게도 선생님의 본명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권선생님은 열렬한 공산당원이었지만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으실 거라 믿었고, 선생님께 정식으로 작별인사를 드리기 전에는 북한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권선생님은 원래 남한에서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한 분인데, 한국을 위해서는 진정으로 공산주의가 필요하다고 믿고 자진 월북을 했다. 우리 기계체조 팀 친구들 중 서너 명은 밤마다 권선생님께 찾아가 영어와 수학 과외를 받았다. 선생님은 돈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쌀과 김치를 가져다 드렸다. 우리는 배움에 굶주려 있었고, 학교에서 실시되는 정치적인 세뇌학습과 공산주의 선전 선동교육에 질려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권선생님의 존재는 하늘에서 내린 선물과도 같았다. 선생님은 헌신적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우리의 영어와 수학 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보시면서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권선생님을 마지막으로 찾아간 날 밤, 나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선생님께 큰 절부터 올렸다. 

“선생님, 지금까지 저를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 받은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간직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일으켜 세우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슬픈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바람에 찬찬히 조리 있게 설명하진 못했지만, 선생님은 나의 상황을 충분히 알아들으셨다. 선생님은 다 듣고 나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우리 아버지가 이미 남한 땅에 가 계신다는 것도, 내가 아버지를 따라 남한으로 내려가야만 한다는 것도…. 


“인성아, 너는 나와 같이 북한에 남아야 돼. 내가 장담하는데, 어떻게든 너를 잘 가르쳐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모스크바 대학에 들어가도록 해줄게. 그게 너에게 훨씬 더 좋은 길이야. 남한으로 탈출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다. 나는 너 못 보낸다!”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던 선생님은 자신이 버리고 온 남한으로 굳이 내려가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한은 미래가 없다. 말이 민주주의지, 봉건제도의 잔재에다 고삐 풀린 이기심이 결합해서, 온 사회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줄도 빽도 없는 북한 청년이 내려가서는 발붙이기 힘든 곳이란 말이다. 목숨까지 걸면서 찾아가야 할 이상향이 아니야! 내가 차라리 너희 어머니를 만나서 설득해 보는 게 낫겠구나!”


어머니를 직접 만나보겠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식구를 제외하고 우리의 탈출계획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외할머니밖에 없었다.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비밀로 한 사실을 내가 친구들과 권선생님에게 털어놓은 것을 우리 어머니가 아셨다면 아마 나는 당장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선생님은 어머니께 연락하지 않았고, 나의 탈출에 대해서도 함구하셨다. 나는 그때의 일을 어머니에게는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1. 자유를 향한 모험


평양역에서


1947년 3월 28일 새벽, 마침내 탈출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살을 에는 3월의 바람이 아들의 살갗을 뚫지 못하도록 따뜻한 내복과 도시락, 비상식량을 마련하고, 튼튼한 가죽 신발을 준비해놓으셨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외할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을 먹었지만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밥상에 앉은 사람은 어머니, 우리 집의 장녀인 인옥 누나와 나, 내 바로 밑의 동생 인자였다. 비록 아버지가 무사히 남한으로 가셨다는 증표는 받았다 하더라도 그 후에 어떻게 되셨는지는 알 수 없었으니, 현재로서는 내가 이 집의 가장이요 유일한 남자였다. 나에게는 두 누이를 무사하고 안전하게 남한까지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내 나이 열 다섯, 인옥 누나 열 일곱, 인자는 열두 살이었다. 


“평양역에서부터 나는 너희와 떨어져서 움직일 거야. 나는 일부러 너희들을 모른 척할 테니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하지만 난 너희들의 움직임을 하나 하나 다 살필 거야. 너희는 더 이상 어린애들이 아니니까 엄마 없어도 겁쟁이처럼 굴지 마라. 어렵거나 무서운 일이 닥칠 때는 마음 속으로 당장 기도를 하거라. 하나님께서 너희와 동행하시며 너희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혹시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멈추지 말고 남한으로 전진해라. 절대 돌아오지 마라, 알겠느냐?”


당시 간난아기였던 정옥이를 업고 포대기를 매면서 어머니는 한번 더 당부하셨다. 나는 학생복 안에 두세 겹씩 내복을 껴입고 그 위에 코트를 입었다. 마른 체형이었기 때문에 옷을 껴입어도 뚱뚱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끼던 옷과 신발들, 책과 학용품들 모두 두고 가야 했다. 나는 아버지께서 지난 생일 때 선물해주신 가죽 방한모만은 포기할 수 없어 머리에 썼다. 속에 토끼털이 붙어 있어 따뜻했다. 


인옥 누나와 인자, 어머니는 모두 가난한 집 여인들처럼 낡은 치마 저고리를 구해 입고 다 헤진 머리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집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캄캄한 새벽이었다. 매의 부리 같은 한기가 사정없이 얼굴을 깨물었다.  나는 방한모자의 귀마개를 내려 턱 아래에서 고정했고, 누나와 인자도 목도리를 코 위까지 친친 감아 둘렀다. 어린 정옥이만 어머니의 등에 업혀 포대기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탈출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바다를 건너야 하므로, 무거운 짐 가방 같은 건 들고 갈 수 없었다. 각자 약간의 소지품과 도시락이 든 작은 가방 한 개씩을 들었을 뿐이다. 어머니께서는 미리 사둔 해주행 기차표를 우리에게 나눠주신 후 마지막으로 우리가 전반적인 탈출 계획을 잘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셨다. 


“해주역에 도착하여 역사를 빠져나간 후에 소 달구지를 몰고 온 농부를 찾고, 우리가 그 농부와 함께 동행하면 어머니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따라오십니다. 농부의 비밀가옥에서 합류하여 기다리다가, 밤이 되면 농부의 지시에 따라 바다를 건너 38선을 넘어갑니다.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와 정옥이는 다시 북으로 돌아옵니다.” 


인자가 요약해서 설명하자 어머니는 흡족한 얼굴을 지으셨다. 어머니는 인자의 머릿수건을 다시 한번 꼼꼼히 묶어주면서 말씀하셨다. 

“우리 인자 똑똑하구나.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겁먹은 내색을 해선 안 돼. 그냥 남쪽으로 휴양을 떠나는 사람처럼 침착하게 행동해라. 모든 여정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남한에 도착하여 편히 쉬는 장면을 생각해라.”

우리는 평양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와 헤어져 역사로 들어갔다. 


친할아버지와의 이별


해주 행 기차가 들어올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는 어머니의 당부를 되새기며 마치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처럼 여유롭게 행동하려 애썼지만,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은 창백하고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남한으로 탈출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멀찍이 앉아 있던 어머니가 먼저 승강장으로 가시는 걸 보고 우리도 대합실 의자에서 일어나 승강장으로 이동하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인파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손짓을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친할아버지였다. 나는 부모님이 할아버지에게도 우리의 탈출계획을 비밀로 하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척 당황했다. 할아버지는 심지어 당신의 소중한 장남이 이미 남한으로 탈출한 사실도 모르고 계셨다. 


“너희들, 이렇게 일찍부터 어딜 가는 거냐? 오늘 학교 가는 날 아니더냐?”

할아버지는 평일 날 아침, 기차역에 있는 나와 내 누이들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굴리다가 가족 모두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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