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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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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북한에서 


2. 중국 단동 시절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집을 압수 당하기 전에 얼른 중요한 것만 챙겨 떠나야만 했다.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급히 작은 보따리 몇 개만 싼 후 아이들을 챙겨서 쫓겨나듯이 집을 나섰다. 외할머니와 부모님, 누나, 어린 여동생 둘과 나는 기차를 타고 평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한국과 중국의 접경지에 있는 단동으로 넘어갔다.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기엔 나는 너무 어렸지만, 아버지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해주셨다. 나는 명씨 가문의 장손이자 우리 집의 유일한 아들이므로 의젓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맡은 임무는 외할머니 곁을 절대 떠나지 말고,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인 인자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살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어린아이답게 평양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잠시 떠날 뿐이고 곧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두국, 빈대떡, 생녹용의 맛

단동에 도착한 지 며칠도 안 되어 아버지는 한인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 자리를 맡으셨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버지는 불도저처럼 자신의 운명을 뚫고 전진하는 힘이 있었다. 그는 의지만큼이나 능력과 기량이 출중했기에 어디 가서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반면, 다섯 살 꼬마였던 나에게 생전 처음 접하는 낯설고 새로운 환경은 공포스럽기만 했다. 무엇보다 함께 뛰어 놀던 친구들이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특히 평양에 비해 길고 추운 단동의 겨울날씨는 도저히 정 붙이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겨울에 추우면 여름에는 좀 시원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여름에는 몹시 덥고 습도까지 높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나마 여름방학 때마다 우리 가족이 북한 청룡의 할아버지 댁에 가서 지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곳에는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많은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모두가 나를 알고 반겨주었다. 마을의 집들이 거의 다 초가집들인데 우리 할아버지 집만 기와집이었던 게 인상적이다. 게다가 할아버지도 맏아들, 우리 아버지도 맏아들이었으니 나는 우리 집안의 귀한 장손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곳에 갈 때마다 대환영을 받았다. 삼촌들, 고모들, 사촌형제들과 자매들과 함께 지내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연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여름 내내 주로 사촌 형들과 같이 대동강에서 수영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면서 놀았다.  


친할머니께서 요리 솜씨가 뛰어나셨던 데다, 그곳에는 각종 음식 재료가 풍부했으므로, 식사 때마다 맛있는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음식 중에서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음식은 만두국과 녹두빈대떡이다. 내 주먹만큼이나 커다랗게 빚은 만두 속에는 돼지고기와 숙주나물, 두부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 만두와 시원한 백김치를 함께 먹으면 환상적인 궁합을 이뤘다. 거기다 솥뚜껑을 뒤집어 돼지 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바싹하게 부쳐낸 녹두빈대떡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일일이 손으로 만든 음식으로 그 많은 식구를 한꺼번에 먹이기 위해서, 할머니는 새벽부터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 녹두를 불리고 맷돌에 갈았다. 그 정겨운 풍경은 언제나 고소한 음식 냄새와 함께 떠오른다.        


사슴농장을 소유하셨던 할아버지는 나를 비롯해서 남자 아이들만 불러 싱싱한 녹용을 먹이곤 하셨다. 털이 부숭부숭한 사슴의 녹용을 칼로 얇게 편을 떠서 입에 넣어주시면 난 그냥 씹어서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비릿한 피냄새 말고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는 “이게 심장에 좋고 특히 남자들에게 좋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자아이들은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보약이었다. 


한편 기억나는 것은, 할아버지 댁에 머무는 동안 어머니와 친할머니 사이에 꽤 자주 충돌이 있었다는 점이다. 내 친할머니는 당시에 유행하던 초혼 풍속의 희생자로,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시집 와서 평생 남편과 자식들을 섬긴 분이셨으니, 동경대학에서 유학까지 하고 온 ‘신여성’ 맏며느리를 이해하기 힘드셨던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를 비롯해서 그곳 여인들이 다들 쪽진 머리에 한복 차림으로 일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단발 커트에다, 양장점에서 맞춘 실크 드레스와 하이힐, 챙 넓은 레이스 모자 차림으로 시골 동네를 활보하셨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그런 어머니를 나무라거나 일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고 하면 “네”하고 순종하는 게 아니라, 사사건건 이치를 따지면서 대들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부엌에 들어가 밥을 하거나 요리를 거드는 일을 회피했다. 한번은 할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어머니가 밥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할머니는 다시는 어머니에게 밥을 시키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완벽한 삼층밥을 지었기 때문이다. 제일 아래쪽 밥은 까맣게 타고 중간은 익었지만 탄내가 배고, 꼭대기 층은 생쌀 그대로였다. 어머니가 일부러 그러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내 어머니는 스스로 밥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외할머니가 따라가서 밥을 해주셨고, 시집오실 때에도 외할머니가 함께 와서 부엌 살림을 맡으셨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를 은근히 비호해주는 분이 한 분 계셨으니 그분은 바로 나의 증조 할머니셨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증조 할머니는 뛰어난 여성 사업가로 사실상 집안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이신 분이시기도 했다.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되자 증조 할머니는 곧바로 비녀를 뽑고 서양식으로 머리를짧게 자르고 모자를 쓰고 다니셨다. 세상이 넓다는 걸 알고, 다르게 사는 방법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증조 할머니는, 일찍이 아들들을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로 유학을 보냈다. 나의 아버지는 고향에 남아 지주의 삶을 물려받은 내 할아버지보다는, 이국 땅으로 유학을 떠난 작은 할아버지들의 삶에 더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탭댄스 추던 소년

11월부터 시작되는 단동의 겨울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식구는 어디서든 즐겁게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는 아버지께서 사주신 스케이트를 들고 나가 꽝꽝 얼어붙은 압록강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스케이트를 타면 곧 몸이 더워졌고, 다양한 동작을 연습하거나 친구들과 경주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당연하게도, 나는 곧 단동의 겨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여름에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네 명과 어울려 매일 압록강에서 수영을 했다. 우리가 수영하던 장소는 물이 깊지는 않으면서도 물살이 휘몰아치는 곳이었는데,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들어가도 튜브만 타고 있으면 그 물살을 따라 저절로 한참을 떠내려갈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급류타기 래프팅(rafting)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게 재미있어서 상류로 올라가서 물결을 타고 하류까지 수영하여 내려오는 일을 반복했는데, 하루는 우리 중에서 가장 수영을 잘 하던 친구가 도중에 사라졌다. 우리는 친구가 잠시 어디 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이상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친구가 벗어놓은 옷과 신발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불길한 예감에 물길을 거슬러 가며 친구를 찾아 다녔다. 해가 다 지도록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어른들에게 알려야 했다. 다음날에도 우리는 그 친구를 보지 못했다. 급류에 영영 떠내려가고 만 것이다. 그렇게 떠내려가다 깊은 곳의 바위 사이에 끼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후부터 우리는 그 장소를 피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식사 초대를 받는 날이 아니면, 일찍 퇴근해서 우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셨다.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재미있게 놀 거리, 웃을 거리를 발견하시는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우리와 같이 수건 돌리기나 ‘사치기’ 같은 놀이를 함께 해주었는데, 지는 사람은 노래를 하거나 장끼자랑이나 재미있는 만담을 해서 우리를 웃겨야 했다. 우리는 힘을 합쳐서 아버지를 공격하곤 했으므로, 가장 잘 걸리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제일 어린 동생을 불러내서 함께 동요를 불러서 우리를 웃겼다. 아버지가 음정 박자 무시하고 어린 동생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노래를 부르시면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에 아버지는 우리 집 최고의 광대이자 코미디언의 역할을 담당하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모여 노는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으므로, 평소에 항상 노래나 장끼를 연습해 두어야 했다. 인옥 누나는 특히 목소리가 곱고 노래를 잘 했기 때문에 우리가 청하면 언제든 노래를 불러주었다. 인옥 누나 덕분에 나와 내 동생들은 모두 노래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는 여동생이 새로 배워오는 노래를 우리는 모두 따라 불렀다. 아버지는 동료들과의 술자리에 가서도 동요를 부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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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인성 박사  

작가소개 

1932년 평양에서 태어난 명인성 박사는 1948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광업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을 졸업했다. 미국 Raytheon Corporation의 자회사인 Seismograph Service Corporation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털사 대학교(University of Tulsa)에서 석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대한민국 포항의 유전개발 프로젝트와 북한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 중국과 남미 등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민간 외교와 사회사업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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