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4 > 미주토크

본문 바로가기
미주지역 바로가기 : Calgary/EdmontonChicagoDallasDenverHouston,    TorontoVancouverHawaiiLANYSeattle

미주토크

이 섹션에 올리는 글은 애리조나,애트란타,보스톤,캘거리/에드먼튼,캐롤리나,시카고,콜로라도 스프링스,달라스,덴버,플로리다,휴스턴,메네소타,필라데피아,샌프란시스코,,토론토,밴쿠버,버지니아,와싱턴DC 총 18개 미주 지역에 동시 개제 됩니다 

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4

페이지 정보

본문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 가족은 노래뿐만 아니라 춤에도 능한 편이었다. 어머니는 동경여대 유학시절 체육을 전공하셨고, 체육 커리큘럼 속에는 무용 과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거기서 배우셨던 각종 춤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으므로, 내 여동생들은 몇 명만 모여도 가무단으로 변신하곤 했다. 고전무용에서부터 현대무용까지, 인도춤과 서양의 모던댄스까지 거의 모든 종목이 가능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가 특별히 나에게만 전수한 춤이 있었으니 바로 탭댄스였다. 어머니는 러시아 양장점에 옷을 맞추러 가실 때마다 꼭 나를 데려가서 내 것까지 맞추어주시곤 했으므로, 나에게는 탭댄스를 출 때 맞춰 입을 수 있는 정장이 몇 벌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장끼자랑을 할 때가 되면 탭댄스 슈즈가 있는 나와 엄마만 짝을 이루어 함께 춤을 추곤 했다. 나는 어머니의 운동신경을 물려받았는지 춤을 꽤 잘 추는 편이어서, 손님이 오셨을 때에도 탭댄스 시범을 보일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 하셨고, 외출 때마다 나를 보디가드 삼아 데리고 다니셨다. 어머니와 단 둘이서 양식당에 가서 서양 음식도 먹고, 맛있는 양과자도 사먹을 때의 즐거움이란 말할 수 없이 컸다. 집에 있을 때는 도저히 어머니를 독차지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임신하지 않았을 때 나와 함께 외출할 여유가 있는 어머니가 좋았다.

 

터프가이(tough guy) 훈련

단동에서의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나에게 빈 주전자 두 통을 내미시면서, 산 아래 동네에 내려가서 차 끓일 물을 두 주전자 가득히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하셨다.

가는 동안 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낯선 중국 사람과는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중국 사람들은 곧잘 남의 아이들을 유괴해서 팔아버린다고 하더라.”

나는 그 소리를 듣자 겁이 덜컥 났고,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것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하지만 내게 맡겨진 일이었기에 묵묵히 순종해야만 했다. 나 말고는 인옥 누나부터 막내까지 모두 딸들이니 그들을 보내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비록 어렸지만 나는 내가 남자이기에 우리 집 여자들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과, 내가 우리 집안을 이끌어갈 기둥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비록 그 당시 어린 아이 유괴범을 만날 경우 내가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붙잡히지 않도록 잽싸게 달려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주전자를 들고 다니면서 온갖 상상을 다 했다. 만약 나쁜 중국인이 나를 유괴하려 하거나 강제로 붙잡으려고 하면 주전자 두 통을 다 버리고 도망치는 게 나을지, 아니면 그 주전자를 방패와 무기 삼아 싸울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는 비탈을 내려갈 때는 아무도 내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빈 주전자 두 통을 흔들면서 무술을 하는 시늉을 했고, 물이 꽉 찬 주전자를 들고 올라올 때는 열심히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년 동안 찻물을 사러 다녔어도 한번도 나쁜 중국인과 마주친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겁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유순한 성격인 나를 조금이라도 더 강하고 책임감 있는 터프가이로 만들고 싶으셨던 것이다. 매일 무거운 주전자를 들고 비탈길을 올라갔기 때문에, 나의 두 팔과 종아리에는 단단하게 근육이 생겼다. 내가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어머니는 매일 나에게 그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때부터 나는 중국인들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청결성도 떨어져 보였는데, 이는 중국인들과 목욕에 관련된 소문들 때문이었다. 중국인들 대부분이 목욕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데다, 보통 일생에 통틀어 세 번 목욕을 한다고 들었던 것이다. 즉 출생 시, 결혼식 날, 장례식 날. 그게 다 물이 귀하기 때문에 생겨난 습관이라는 것을 그곳에 살아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비행기 한 대를 통째 기부한 여자,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일본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동창생과 단동시에서 마주쳤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당시 단동시의 시장을 맡고 있던 일본 고위 간부의 아내였다. 그 당시 우리 아버지는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늘 사상적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그 동창이 주관하는 행사들에 참여해야 했다. 한번은 일본 공군을 위한 모금운동의 일환으로 주민들에게서 철제 물건들을 기부 받는 행사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아버지에 대한 일본정부의 의심을 한방에 날려버리기로 결심하셨다. 어머니는 시장부인인 동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잔잔한 철제 물건 모아 뭐하겠니? 내가 그냥 비행기를 한 대 사줄게!”

어머니는 당시 세계적인 무용수로 이름을 떨치던 최승희씨를 단동으로 초청하여 단동 극장에서 공연하도록 했다. 칼춤, 부채춤, 승무에다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추는 현대무용까지, 최승희의 춤을 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녀의 무용 공연은 날마다 대성황을 이루었고, 일주일 공연이 끝나자 정말로 비행기 한 대를 살 만한 자금이 모였다. 어머니는 그 수익금을 통째로 일본 공군에 기부했다.

최승희 공연으로 거금을 기부한 후부터 아버지를 뒤쫓아 다니던 일본첩보원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어머니 덕분에 최승희를 사석에서 만난 일이 있는데, 우리 어머니도 결혼하지 않고 무용을 했더라면 그녀처럼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최승희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은 어머니와 매우 비슷했다. 어머니는 평소 러시아 의상실에 가서 최신 유럽 패션의 옷을 해 입었다. 그 당시 스탈린을 선두로 공산당이 러시아를 장악하게 되자 많은 백인 러시아인들이 중국의 남쪽인 단동으로 도망을 왔다. 그래서 그들이 차린 식당과 가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외국의 풍습과 문화에 관심이 많고 패션 감각이 뛰어나셨던 어머니에게는 러시아 상류층의 문화를 맛보는 것이 하나의 낙이자 갑갑한 현실의 탈출구였던 것이다.

나중에 내가 소학교에 다니던 때의 일화가 기억난다. 어느 날인가 내가 점심도시락을 집에 두고 온 날이었다. 나는 그냥 내 짝의 도시락을 같이 나눠 먹을 생각이었는데, 점심 시간이 되자마자 교실 뒷문이 열리며 어머니께서 교실로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깃털 달린 모자와 유럽풍 정장에 무릎까지 오는 가죽부츠 차림이었다. 반 아이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무슨 영화배우가 걸어오는 줄 알았나 보다. 어머니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기면서 나에게로 다가와 당당하게 내 책상 위에 도시락 가방을 내려 놓으셨다.  

햄 계란 샌드위치다. 맛있게 먹어.”

어머니가 나가신 후에도 나는 그 도시락을 풀어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샌드위치가 뭔지도 몰랐고, 대부분 햄이라는 걸 구경조차 못했다. 꽁보리밥과 삶은 감자를 도시락으로 먹는 아이들 속에서 도저히 샌드위치를 꺼내 먹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그냥 자리에 앉아 공부만 했다. 결국 나중에 손도 안 댄 샌드위치를 집으로 가져갔다. 어머니는 도시락 가방을 열어보고 노발대발하셨다.

이 못난 놈! 샌드위치가 뭐 별거라고! 그렇게 용기가 없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왜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먹지 못해? 남들과 다른 게 뭐 어때서! 이건 나에 대한 모독이다!”

그날 엄청나게 심하게 매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도시락을 부끄러이 여긴 죄였다.  

굳이 샌드위치가 아니라도 나의 도시락은 다른 친구의 도시락보다 화려했다. 내 도시락에는 소고기 장조림과 계란 같은 것이 들어가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대체로 보리밥과 짠지가 들어간 도시락을 가져왔다. 특히 우리 반 반장이면서 나와 친했던 김명선은 집이 너무 가난했지만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나는 주로 그 친구와 도시락을 바꿔먹었다. 내가 일본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그 친구는 돈이 없어서 중학교를 포기해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명선을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어머니는 사회운동가(social activist) 다운 데가 있었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만 직성이 풀렸다.  

 

신사참배와 사쿠라 정신

중국에 머문 지 2년째 되던 해, 아버지는 단동시의 한국인 협회로부터 초빙을 받아 신흥한인 중학교의 교장이 되셨다. 당시 신흥중학교에는 오백 여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북한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해 나는 일곱 살이 되었으므로 대중 소학교에 입학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었지만 선생님들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섞여 있었다. 단동은 원래 중국 영토였으나 1876년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이후로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 도시에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이 섞여 살고 있었고, 나는 1학년 때까지 일본어와 중국어를 함께 배웠다

<다음주에 계속>



a21790e9e949f41d6fb1b828c2b8ea89_1697816303_9474.jpg
(고)명인성 박사  

작가소개 

1932년 평양에서 태어난 명인성 박사는 1948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광업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을 졸업했다. 미국 Raytheon Corporation의 자회사인 Seismograph Service Corporation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털사 대학교(University of Tulsa)에서 석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대한민국 포항의 유전개발 프로젝트와 북한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 중국과 남미 등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민간 외교와 사회사업도 병행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Login

회원가입
이번호 신문보기 더보기

회사소개(KOR) | 광고&상담 문의
KYOCHARO NTV ENTERPRISES LTD.
#327D- 4501 North Road, Burnaby, BC, V3N 4R7, CANADA
TEL. 604-444-4322 (교차로) | 604-420-1088 (TBO) | E-MAIL. vancouver@kyocharogolf.com
Copyright © KYOCHARO NTV ENTERPRISES LTD.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or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팝업레이어 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