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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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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서>


가미카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한 일본군 특공대를 말한다. 당시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지만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의 폭격은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조종사가 전투기와 한 몸이 되어 적함을 향해 돌진하여 폭발을 일으켰으므로 인간 미사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어로 가미카제란 ‘신의 바람’이라는 뜻이며 이는 13세기 말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했을 무렵 불어닥친 태풍의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출정하던 연합군 함대는 심한 태풍을 만나 전멸했는데, 이에 대해 일본인들은 신이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바람을 보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또 한번 신의 바람이 불기를 염원하던 일본은 자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강한 바람을 생성하여 미국을 무찌르기로 작정했고, 그게 바로 가미카제 특공대가 시작된 배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출격할 때는 기름도 왕복이 아니라 항공모함까지 가는 편도만 제공되었다고 한다. 실상을 들어보면, 모두가 약간의 훈련만 받은 상태에서 조종사가 되었으므로 공중에서 미항공 모함을 겨냥해서 떨어졌지만 조종미숙으로 대부분이 바닷물 속으로 허무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구두 시험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부모님께는 끝내 말씀드릴 수 없었다. 부모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가미카제 특공대에 지원하겠다던 나의 결심은 단지 입학허가를 받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일본교육과 선전활동에 철저히 세뇌가 되어 있었기에 내 의무와 운명은 신으로 여겨지던 일본제국의 천황을 섬기는 것이라고 확고히 믿었다. 나를 포함하여 6년동안 민족말살정책하에서 황국의 신민으로 키워지는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지속적으로, 매우 철저하게 사쿠라 정신에 길들여졌다. 즉 나흘 동안 만개했다가 곧바로 흩어지는 짧고 정열적인 벚꽃처럼 살고 죽는 것, 젊음의 절정에서 일본 천황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일본을 위해 장렬하게 죽을 생각을 했는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세뇌의 무서운 위력에 치를 떨게 된다.   

일본 중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대학교에 진학할 때, 내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된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 한국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공은 한정되어 있었다. 과학과 공학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대부분이 철학, 문학, 인문학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한국인들이 전문 기술 분야를 공부하여 일본인의 경쟁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제가 고안한 정책이었다. 나는 과학이나 공학을 공부하고픈 갈망이 있었기에 당돌하게 일본 중학교 입학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도 그런 나의 뜻을 알고 계셨기에 말리지 않으셨던 것 같다. 내가 가보지 못한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가끔씩 들려주시는 미국에서의 경험담이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나도 선진 과학을 공부하여 반드시 그 나라로 가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의 현실의 상황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박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3층집과 장난꾸러기 막내 삼촌 명재휘


처음 평양을 쫓기듯이 떠나 단동시에 정착했을 무렵에는 산동네에 살았었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한인 중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하면서부터 형편이 나아지자 방이 다섯 개나 되는 3층집을 짓게 되었다. 집 안에는 어머니의 취향에 맞는 멋진 가구들도 들여놓았고, 커다란 서양식 부엌에는 러시아산 나무로 만든 식탁을 두었다. 바깥의 정원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도록 유리로 된 격자창을 만들었고, 장식이 화려한 커튼도 달았다. 바깥 정원에는 잔디도 깔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과일나무들과 꽃나무들도 심었다. 나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이유로 2층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드는 방을 혼자 차지하게 되었다. 보고 들은 게 많은 어머니는 집을 설계할 때부터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놓으셨고, 집을 짓는 동안에도 매일 그곳에 가서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았다. 우리 가족들의 소원이 모두 조금씩 반영된 그 집에 마침내 입주하던 날의 흥분과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어린 여동생들은 집 안에 계단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하루 종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놀았다. 나는 처음 갖게 된 나만의 방이 신기해서,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책상에 앉아 고독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한밤중에도 홀로 깨어 촛불 하나를 켜놓고 편지를 쓰기도 하고,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밤새 고민하다가 창 밖이 밝아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즐거움은 친구들을 내 방에 초대해서 우리끼리 비밀 이야기를 나누며 놀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집은 특이하게도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실내 계단이 없었다. 1층과 2층 위에 조그맣게 지어진 3층으로 올라가려면 바깥에서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사실 처음부터 집을 그렇게 지은 이유는 막내 삼촌 명재휘 때문이었다. 막내 삼촌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다니는 수재였는데, 졸업반이 되었을 때 징병을 피하기 위해 배를 타고 중국을 거쳐 단동의 우리 집으로 와서 2년 동안 숨어 살았다. 부모님은 삼촌을 숨기기 위해 3층에서 먼저 밧줄을 내려주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도록 집을 설계한 것이다. 삼촌은 나와 아홉 살 차이여서 형이 없던 나에게 사실상 형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머리가 좋고 일본어와 영어, 수학 등에 모두 능통해서 나는 종종 삼촌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인옥 누나가 귀찮다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나는 큰소리로 삼촌을 불렀고, 삼촌이 밧줄을 내려주면 그 밧줄을 타고 삼촌에게로 올라갔다. 당시에는 일본 정부에 가족 수를 등록하고 그 수만큼 쌀을 배급 받아 먹었는데, 당연히 삼촌은 등록되지 않은 식구였다. 우리가 먹는 밥을 삼촌에게 나눠주었으므로 삼촌은 늘 배가 고팠고, 아무 때나 집 아래로 내려올 수도 없었다. 나는 삼촌에게 올라갈 때마다 먹을 걸 숨겨서 가져가곤 했는데, 삼촌은 그게 떡이든 고구마든지 간에 한 자리에서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일종의 과외비였던 셈이다. 다 먹고 나서야 나에게 용건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영어나 수학 문제를 내밀면, 삼촌은 문제를 살펴본 다음에 곧바로 가르쳐주지 않고 일단 “야, 넌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를 수 있니?”라고 말하면서 약부터 살살 올렸다. 나는 무척 약이 오르고 수치심을 느꼈지만 끝까지 참아야 했다. 속으로는 ‘다시는 내가 삼촌한테 물으러 오나 봐라’ 하고 조용히 결심했다. 내가 화가 나서 시무룩해질 정도가 되면 그제서야 삼촌은 문제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삼촌의 설명을 듣고 모르던 문제가 해결되면 그땐 다시 삼촌이 신처럼 보이고 미웠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이었다. 


삼촌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인옥 누나는 대놓고 삼촌을 미워했다. 인옥 누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삼촌이 나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옥 누나를 놀려먹기 좋아했던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삼촌이 인옥 누나의 친구를 티 나게 좋아했기 때문이다. 인옥 누나 친구 중에 지금 이름은 잊었지만 얼굴이 뽀얗고 이목구비가 고운 누나가 있었다. 그 누나를 보자마자 반해버린 삼촌은 위험한 것도 모르고 밧줄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누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았다. 삼촌은 개인기를 발휘해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까지 불렀다. 삼촌의 노래가 수준급이기도 했지만, 기타를 치는 삼촌은 정말 멋있게 보였다. 우리는 삼촌의 존재가 바깥에 알려질까 봐 걱정이 되어 죽겠는데, 삼촌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식이었다. 그러고는 자꾸 그 친구를 또 데려오라고 인옥 누나를 꼬이고 못 살게 굴었다. 인옥 누나는 “삼촌은 너무 징그러워! 어떻게 조카 친구한테 추파를 던지고 그래?”라며 노여워했다. 인옥 누나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누나는 밥을 풀 때 삼촌 밥그릇에는 특히 밥알을 살살 세워서 펐다. 보기에는 한 그릇이지만, 눌러보면 반 그릇 밖에 되지 않도록 밥을 푸는 건 인옥 누나만의 기술이었다. 


그 삼촌과의 추억은 그것 말고도 많다. 재휘 삼촌은 나중에 우리를 따라 남한으로 내려왔다. 삼촌은 친가 친척들 중에서 유일하게 남한으로 내려온 혈육인데다, 미국에 유학을 와서 공부를 마친 후 캘리포니아에 취직하고 정착했다. 그래서 나와 평생 동안 친하게 지냈다. 게다가 삼촌은 장수를 해서 작년(2015년)에 9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작년에 삼촌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건강이 나빴지만 억지로 우겨서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내가 도착할 무렵, 삼촌은 혼수상태에 접어들어서, 나는 삼촌에게 혼자 작별의 말을 건네고 휴스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돌아온 직후 삼촌은 멀쩡히 깨어나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나에게 다정하게 “인성아”라고 불러주는 어른으로는 그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처럼 장난기 많은 삼촌과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결국 6개월 뒤에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아가 된 내게 삼촌은 오랫동안 아버지 같고 형 같은 존재로서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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