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8 > 미주토크

본문 바로가기
미주지역 바로가기 : Calgary/EdmontonChicagoDallasDenverHouston,    TorontoVancouverHawaiiLANYSeattle

미주토크

이 섹션에 올리는 글은 애리조나,애트란타,보스톤,캘거리/에드먼튼,캐롤리나,시카고,콜로라도 스프링스,달라스,덴버,플로리다,휴스턴,메네소타,필라데피아,샌프란시스코,,토론토,밴쿠버,버지니아,와싱턴DC 총 18개 미주 지역에 동시 개제 됩니다 

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8

페이지 정보

본문

북한으로 이송된 소련 연대 중 한 곳은 25%가 여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덩치 크고 난폭하기가 남자 군인들 못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을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남자들을 납치하여 자기들의 숙소로 데려가 원하는 만큼 성욕을 채웠다고 한다. 당시의 소련 군법에 의하면 남녀군인은 서로 데이트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만약 이를 어기면 심하게는 사형에 처할 정도로 혹독한 벌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소련 여군들은 암암리에 한국 남자들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우리 국민들은 소련군이라면 남녀를 막론하고 무조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목숨 걸고 다니던 새벽기도회

 

당시 나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외할머니와 함께 새벽기도회에 갔다. 단잠을 포기하고 일어나는 건 고통스러웠지만, 일단 바깥으로 나오면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달과 별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인성아, 저 달과 별빛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희망의 메시지란다.”

할머니는 종종 그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별자리들의 이름을 할머니에게 가르쳐 드렸다. 할머니는 별에 얽힌 전설들을 들려주시기도 했고, 나보고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도 하셨다. 가로등도 전등도 없지만, 달빛은 우리의 앞길을 은은히 밝혀 주었다.

저기 봐라. 달이 우리를 걱정해서 계속 따라오잖아. 아까는 우리 집 앞에 있었는데, 이제 또 저 나무 위에 있잖아. 그렇지?”

종교 핍박으로 인해 공식적인 교회 모임을 가질 수 없었으므로, 매번 외딴 외양간이나 헛간 같은 비밀 장소에 모여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꽤 긴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물리쳐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다. 그러나 일제가 물러가고 소련 공산당들이 들어오자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더욱 심하게 탄압했다. 우리는 또다시 종교의 자유를 잃었고, 교회건물들은 북한 인민군들이 모조리 차지하여 숙식장소로 사용함으로써 험하게 망가져갔다.  

그때는 지금처럼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시절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박해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나갔던 신앙은 지금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뜨거웠고, 그래서 더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미국에 와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나의 믿음은 오히려 약해진 구석이 있다. 삶의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이 편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날 들은 설교에 대해 외할머니와 함께 나누던 대화들이야말로 값을 따질 수 없이 소중한 교훈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하루의 삶이 끝없는 기도의 연속이었고, 그래서 더욱 지혜와 통찰과 사랑이 넘쳤다. 온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밥을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모든 손길에 기도와 소망이 넘쳤다. 할머니는 늘 나의 건강과 미래를 위해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 덕분에 내가 그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지금도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수학에 빠지다

 

평양의 학교 시스템이 러시아의 시스템을 따라 중학교 6년 과정에서 중학교 3 · 고등학교 3년 과정으로 변경됨에 따라 나는 곧 평양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중학교들은 많으나 고등학교는 적어서 입학경쟁이 치열했다. 그런데도 학교에는 제대로 된 교육과정이라는 게 부재했으므로 나는 매일 밤 5-6시간에 걸쳐 수학과 영어 과외를 받았다.

나의 과외선생님은 남한에서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수재였으나 남한의 부패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공산주의를 동경하여 북한으로 자진 월북하여 공산당원이 된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수학과 영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진정한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나는 어렵고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느라 자주 밤을 세우곤 했다. 수학문제 하나를 풀었을 때의 그 달콤함과 희열감이란! 그건 마치 고생스럽게 산을 오른 사람이 정상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견줄 만 했다. 새로운 문제들 각각이 놀이라는 생각으로 도전했다. 그런 태도는 모든 일과 환경에서 즐거움의 요소를 발견하던 우리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나는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 한 분이 월북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듣기로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라고 했다. 나는 비록 열네 살 소년에 불과했지만, 배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어서 어떻게든지 그 교수님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분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매일 한번씩 김일성 대학 정문 앞을 서성거렸다. 당시 한국 풍습에 의하면, 어린 학생들이 위대한 교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경우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무례한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나는 그저 정문 앞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요즘 연예인 팬클럽의 소녀들이 방송사 앞에서 진 치고 기다리는 심정과 비슷하다고 할까? 나는 사진으로만 알고 소식으로만 들은 그 교수님에게 정말로 푹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 교수님이 정문을 통과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는 바람에 그분에게 뛰어가 대화를 건넬 수도 없었다. 그 동안 그 순간을 수십 번 상상하면서, 그분에게 용감하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내가 그분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리고, 나도 나중에 교수님 같은 훌륭한 수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씀 드리는 연습을 했었지만, 정말로 실행에 옮기기엔 나는 너무 수줍음이 많았다. 나는 그 교수님에게 단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그저 내 앞을 지나가는 것만 바라보기만 했다. 교수님은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그분을 한번 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꿈이 현실이 된 듯한 감격과 열광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어둡고 무력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현실의 비극에만 몰두하여 공포에 떨지 않고, 그것을 초월한 곳에 놓인 우리의 꿈과 소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1.    북한의 첫 지도자 김일성

 

김일성과 보낸 하룻밤

1929, 나의 종조부님(할아버지의 형제) 중 한 분인 명희조 역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그곳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중 그는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열성 당원으로서 러시아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19451012일 소련군 민정 담당 부사령관인 로마넨코의 특별 자문관에 임명되었다. 소련 민정은 평양에 주둔한 소련군25군 군사회의의 산하기구로서, 레베데프, 로마넨코, 샤닌, 체렌코프, 프르소프 5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로마넨코는 25군 부사령관이자 집행책임자로서 북한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였다.

종조부님은 로마넨코와 한국인들 사이의 의사 소통을 담당하면서 로마넨코의 오른팔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나의 아버지 명재억이 미국에서 유학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미국에 남지 않고 가난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을 높이 평가했다. 아버지는 해방직후 평양으로 돌아와 북한의 농업부 장관이 되었는데, 종조부는 그런 조카(나의 아버지)를 매우 자랑스러워 하였다.

어느 날 종조부님은 당시 소련군 소령이었던 33세의 김일성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 함께 식사를 했다. 소련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소련군대의 장교가 된 김일성 소령은 남자답게 잘 생긴 외모와 훤칠한 키로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나는 그를 만난 후부터 나도 소련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종조부는 그 후에도 가끔씩 김일성 소령을 우리 집으로 불러 함께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면 당시 소학교 학생이던 어린 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며 재롱을 피웠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모두 춤까지 잘 추었으므로, 작은 공연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김일성은 우리 가족에게 반해 버렸고, 우리 가족과 좋은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김일성은 곧 소련 정부가 지지하는 군사적 영웅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2bf2f5093157726e920524688d05b626_1703263196_3736.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Login

회원가입
이번호 신문보기 더보기

회사소개(KOR) | 광고&상담 문의
KYOCHARO NTV ENTERPRISES LTD.
#327D- 4501 North Road, Burnaby, BC, V3N 4R7, CANADA
TEL. 604-444-4322 (교차로) | 604-420-1088 (TBO) | E-MAIL. vancouver@kyocharogolf.com
Copyright © KYOCHARO NTV ENTERPRISES LTD.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or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팝업레이어 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