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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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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서>


그가 지도자가 되기 직전의 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저녁, 온 가족이 안방에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당에서 쿵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방문을 열어 보니 소련군 한 명이 우리 집 담을 넘은 후 대청마루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난히 몸집이 큰 그 소련군은 위협적으로 총을 겨눈 채 군홧발로 마루를 밟고 올라섰다. 러시아 말로 뭐라고 말하며 킬킬거리는데 아마 “반항하면 쏜다”라는 것 같았다. 앞에서 소련군의 만행을 소개했으니 짐작하겠지만, 통제할 수 없는 사나운 짐승 한 마리가 들어온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실제 총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총알이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술에 취한 그 사람의 눈빛에서 그가 원하는 게 입에 담기도 싫은 나쁜 짓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불이 켜진 안방 문을 와락 열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우리는 어디로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아버지의 밥상 위에 반주로 드시던 술이 담긴 술병과 술잔이 놓여 있었다. 그 군인이 술병을 쳐다보는 걸 보고 아버지가 재빨리 러시아 말로 술을 권했다. 다행히 그 군인은 아버지가 내미는 술잔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총을 자기 손이 닿는 곳에 내려놓고 상 옆에 앉았다. 술도 술이지만, 막 차려진 음식이 그에겐 큰 유혹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가족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술을 몇 잔 따라 건네는 동안 어머니가 내게 눈짓을 하시면서 슬며시 몸을 움직여 나를 가려주셨다. 나는 재빨리 방문을 빠져 나와 맨발로 종조부님의 도움을 구하러 뛰어나갔다. 


나는 종조부님을 쉽게 만날 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 드렸다. 내가 있다고 해서 큰 도움은 못 되었겠지만, 우리 집에는 아버지를 제외하면 온통 여자들뿐이었으니 걱정이 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언제든 자기를 쏠 수도 있는 사람과 마주앉아 술을 마셔야 하는 아버지 심정이 어떨지, 그 옆에서 벌벌 떨면서 앉아 있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쉽게 종조부님을 만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 김일성 소령도 함께 있었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김일성 소령이 자청해서 종조부님을 따라 우리 집으로 왔다. 그리하여 소련군, 아버지, 종조부님과 김일성 소령이 함께 술잔을 기울였고, 나도 남자의 신분으로 그 자리에 끼어 앉아 있었다. 그림만 보면 남자들끼리 거나하게 술을 마시는 자리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한 가족을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강도 옆에 몇 명의 인질이 더 가세한 형국이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이미 차려진 밥상 위의 음식들이 사라지기 전에 가장 좋은 음식을 꺼내어 즉석 술안주를 만들었다. 각종 전들이 기름에 지져지면서 나는 냄새가 그 소련군을 유혹했을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굶은 사람처럼 음식들을 허겁지겁 손으로 집어 먹기 시작했다. 종조부님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러시아어로 통역하며 그 소련군에게 음식과 술을 잔뜩 권했다. 위스키에 보드카에 온갖 독주가 다 동원되었다. 커다란 체구만큼이나 그 소련군은 술이 셌다. 종조부님, 김일성, 우리 아버지는 어느 시점부터 술을 마시는 시늉만 하고 넘기지 않아 술이 줄어들지 않았지만, 소련군은 취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종조부가 러시아어로 소련 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 소련군도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진 소련군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너 곡의 러시아 노래를 더 불렀다. 그러면서 계속 보드카를 마시더니 노래를 부르던 중 갑자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우리는 술상을 물린 후 모두 함께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남자 다섯 명이 나란히 안방에 누웠다. 소련군은 이미 인사불성이었지만, 언제 술이 깨어 행패를 부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한테 장전된 총이 있어요. 혹시라도 저 소련군이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내가 총으로 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쇼. 그리고 제가 달리 지시하기 전까지는 가만히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마십쇼.”


김일성 소령은 소련군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우리에게 속삭였다. 그에게서는 경험에서 묻어난 조심성과 위엄이 풍겼다. 그 지극한 공포 속에서도, 나는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였던지 따뜻한 온돌방에 눕자 곧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를 제외한 어른들은 아마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뜨자 아침이었고, 전날 밤 위협이 되었던 소련군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종조부님과 김일성 소령과 아버지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이부자리도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나 혼자 편안히 누워 늦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날 아침 방바닥의 온기와 창으로 비쳐 들던 햇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간밤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김일성 소령에게 감사를 표명한 후 우리는 모두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가히 지옥에서의 하룻밤이라 할 만한 밤이었다. 그날 밤 우리 일가가 몰살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로마넨코의 오른팔이라 할 종조부님과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될 김일성 소령이 힘을 합쳐도 일개 소련군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하면, 당시 우리가 얼마나 힘이 없는 백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이 김일성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가 수령이 된 후에는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1994년, 나는 미국 석유개발 프로그램 컨설턴트로서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생겨서, 김일성 수령을 한번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랐었다. 우리 가족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아주 아주 오래 전, 그가 한 가족의 목숨을 구해준 일을 기억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도착하기 몇 개월 전에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투기 폭격에 희생당한 학생들과 함석헌 선생님


1946년 말, 이북의 중학교 학생들이 연합하여 북한 정부를 상대로 평화시위에 나섰다. 군사 훈련과 세뇌교육이 학교 커리큘럼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학생들은 그 비중을 낮추고 더 많은 교육 프로그램을 허락해 달라고 외쳤다. 그것은 학생다운 요구를 담은 순수한 목적의 행진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소련 전투기 두 대가 나타나 공습을 퍼붓는 바람에 미처 피하지 못한 학생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투기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도, 거기서 정말로 폭격을 퍼부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눈앞에서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무고한 어린 학생들을 무참히 살해한 소련군의 납득할 수 없는 횡포에 분노했다. 


당시 평북자치위원회의 문교부장이었던 함석헌 선생님은 소련 부사령관을 직접 찾아가 그 잔인 무도한 사건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부사령관의 답변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학생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일본군 잔당인 줄 알고 공습했다는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지 1년도 넘었을 때였으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소련군의 공습으로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함석헌 선생님은 다시는 정부가 제안하는 고위관리직을 수락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고한 학생들의 죽음을 오랫동안 애도하며 농사만 짓고 살겠다고 했다. 함석헌 선생님은 내 아버지의 오산학교 동창이었고,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수학했다. 함선생님은 교육학을, 아버지는 농경학을 수료했다. 1945년도에 아버지는 북한 정부의 농업부 장관이었고 함선생님은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었는데, 두 분은 매우 각별한 친구 사이였다. 


그 후 북한 당국은 함석헌 선생님을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하여 감옥에 보냈다. 학생들을 부추겨 소련 공산당 규탄을 선동했다는 죄명으로 소련군 감옥에 갇힌 것이다.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세력이 아닌 건 확실했지만, 원래 공산당원이 아닌 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함선생님에게 음식을 가져다 드리기 위해 몇 차례 감옥에 면회를 갔다. 그 감옥은 특별히 박스형으로 제작되었는데, 한 사람이 겨우 옆으로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어머니는 분개하시며 이러다가는 선생님이 돌아가시겠다고, 어떻게든 선생님의 누명을 풀어드리겠노라고 맹세했다.  


우여곡절 끝에 종조부님께서 소련 장교에게 부탁하여 함석헌 선생님은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이미 장기 계획이 구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어머니는 그를 직접 해주 시로 모시고 가서 그 지역의 가이드를 통해 남한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때 어머니는 사실상 아버지와 우리 가족 모두를 탈출시킬 계획을 완료한 상태였던 것이다. 함선생님은 어머니의 계획대로 무사히 남한으로 탈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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