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보다 70년 앞선 북미 첫 노예해방자 로버트 카터 >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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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링컨보다 70년 앞선 북미 첫 노예해방자 로버트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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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년 전 일요일, 로버트 카터 Robert Carter 3세가 노섬벌랜드카운티 법원청사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는 500명 이상의 노예를 석방할 법률문서를 내놓았다.

카터는 버지니아주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대표자였다. 그는 그 문서를 ‘선물증서(Deed Gift)’라고 이름 붙였다. 

70여년 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법을 제정하고 선언하기 전까지 카터의 노예해방은 역사상 흑인들에게 가장 큰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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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9월5일 카터가 증서를 전달했을 때만 해도 노예제도는 갓 태동한 미국의 새로운 국가경제의 핵심동력이었다. 그러나 많은 흑인노예를 부리던 건국의 아버지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을 포함한 많은 노예 농장주들은 그들과 친분을 가진 카터의 이같은 대담한 행동에 비위가 상했다.  

이들은 노예를 재산취급하는 제도는 잘못이지만 사회적, 경제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하루 아침에 폐지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때였다.

"지금 우리는 늑대의 귀를 잡고 있는데 그를 잡아둘 수도, 놓아줄 수도 없다. 정의라는 잣대의 다른 쪽에는 자기보존이란 것이 있어 발란스가 맞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갑론을박은 카터의 선물증서 제공 이후 거의 30년 만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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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는 노예를 해방시키면서 자유의 몸이 된 그들이 자립하고 전체사회에 통합되기 위한 청사진도 제공할 만큼 앞서 갔다.

조지 워싱턴은 죽은 후 노예들을 전부 해방시켰으나 제퍼슨은 자신의 노예 1백 명 중 단 10명만 풀어주는 인색한 사람이었다.

카터가 석방한 흑인노예의 후손들의 견해다. 

“카터의 폭탄선언은 당시 크게 인정받지 못했고 추종되지도 않았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을 미국민의 양심으로 통합하고 영원히 기려야 한다.”

메리웨더 길모어Meriwether Gilmore는 카터의 노미니홀 저택과 2천 에이커에 달했던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머니 쪽으로 카터의 친척이다. 그녀의 동생은 이름에 카터 어머니 이름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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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어는 "로버트 카터 3세의 이야기는 아주 중요하다"면서 "백인 부자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념이 현실에 안주하는 사고보다 얼마나 더 강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은 힘들지만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토마스 듀켄필드는 자유가 후손들에게 주는 교훈을 발견했다. 워싱턴D.C. 변호사는 톰슨스와 뉴먼스 부부의 후손이다. 이 부부의 후손들은 50명이나 카터의 해방증서에 기록되어 노예에서 벗어났다.   

12살 때부터 듀켄필드는 혈통계보 조사에 몰두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 쪽을 집중했다. 그가 어머니쪽을 파고 든 것은 어머니가 가져온 신문스크랩을 본 후다. 스크랩은 ‘노미니홀이 있던 근처, 클로버로 덮힌 잔디 위에서 횃불을 켜고 열린 황혼의식’에 대한 기사였다. 1991년 선물증서 200주년을 기념하는 이 행사는 길모어의 아버지 프랭크 델라노가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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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은 1870년 이전에는 인구조사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노예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다. 듀켄필드는 그의 어머니의 가계도를 조사하면서 "톰슨과 뉴먼 부부의 가문이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 사람들은 적어도 그때부터 자유 흑인이었다."

변호사는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카터의 노예해방자 후손인 우리는 다른 노예들보다 앞서 해방되어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다. 그 점에서 카터의 해방은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많은 흑인노예를 해방한 선구자'

당시 카터는 버지니아 상류층에서 높은 신분이었다. 그는 워싱톤의 이복형제 로렌스, 제임스 매디슨(4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3대 대통령)의 친구였다.  워싱톤은 바로 이웃에 살았고 남북전쟁의 남군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과도 인척이었다. 

1750년 로버트 카터 3세는 노미니 홀의 드라이브를 따라 포플러 나무들을 심었다. ‘킹King 카터’라고 불리운 카터의 조부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지녔고 1천명의 노예와 30만 에이커가 넘는 땅을 소유한 식민지통치자(governor)였다. 조부는 1732년, 아들보다 3개월 앞서 죽으면서 새로 태어난 손자에게 모든 재산을 남겼다. 

이로써 카터는 나이가 아래인 워싱턴과 제퍼슨보다 훨씬 부유했다. 오늘날 지도에서 찾기 힘든 넓게 뻗은 노미니홀은 그의 16개 농장 중 하나였다.

종교적 방황자였던 카터가 노예를 해방한 첫 번째 인물은 아니다. 중산층 퀘이커 교도들과 침례교도들을 포함한 일부 농장주들은 이곳 저곳에서 노예들을 풀어줬지만 어느 누구도 카터 같은 대담한 행동에 맞설 만하지는 못했다. 카터는 511명의 노예를 순차적으로 풀어주고, 우선 노인들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아이들을 해방했다.  

카터는 해방된 노예들이 그들의 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그때까지 노예들은 성이 없이 이름으로만 불렸다), 가족을 유지하고 재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기술을 갖고 땅을 사거나 임대할 수 있었고 장비를 살 수도 있었다.  또한 카터는 그들을 여러 곳의 농장에서 노섬벌랜드 법원청사로 운송하는 데 많은 돈을 썼다. 이뿐 아니라 자기의 후손들이 자기결정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법적 문서를 만들기 위해서 적지 않은 변호사 비용을 지불했다. 물론 그의 상속자들은 그것에 대해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앤드류 레비 버틀러대 교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카터의 계획은 대량 해방을 위한 전초였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위대한 사실이 소수인들과 후손들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을까? 

1. 카터는 노미니홀에 있는 자신의 무덤에 아무 표시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의 관심을 피했다. 카터가 남긴 유일한 단서는 그의 설명뿐이다. "나는 그들을 노예로 유지하는 것은 종교와 정의의 참된 원리에 반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을 해방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확신한다."

2. 다른 가설은 제퍼슨, 매디슨, 워싱턴과 같은 부유한 동시대 유명인사들과 달리 카터는 정치에 관심이 적어 각광받지 못했다는 것. 

3. 노예해방은 인기가 없었고 오히려 백인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카터의 집을 불태우겠다는 위협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해방문서는 될수있는한 조용히 처리됐다. 리치먼드 지방신문의 간단한 기사가 보도의 대부분이었다. 

카터의 자서전 ‘첫 번째 해방자(The First Emancipator)’를 저술한   레비 교수는 “미국은 신경 쓰지 않는다. 불편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레비 교수의 견해와 같이 미국역사는 수십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킬 실용적인 방법이 없다는 건국 아버지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패러디했다. 노예제도는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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