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2 > 미주토크

본문 바로가기
미주지역 바로가기 : Calgary/EdmontonChicagoDallasDenverHouston,    TorontoVancouverHawaiiLANYSeattle

미주토크

이 섹션에 올리는 글은 애리조나,애트란타,보스톤,캘거리/에드먼튼,캐롤리나,시카고,콜로라도 스프링스,달라스,덴버,플로리다,휴스턴,메네소타,필라데피아,샌프란시스코,,토론토,밴쿠버,버지니아,와싱턴DC 총 18개 미주 지역에 동시 개제 됩니다 

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2

페이지 정보

본문

I. 북한에서 


1. 평양 출생과 어린 시절 


<지난주에 이어서>


선택 받은 하숙생

아버지는 운 좋게도 그곳에서 동경여자대학교 체육학과에서 유학 중이던 나의 어머니 전봉란을 만나셨다. 어머니는 경기여자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간 것이다. 내 어머니의 아버지 전성호는 당시 경상북도 안동의 군수로, 일찍이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수재였다. 나의 외할머니는 딸의 유학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동경으로 와서 하숙집을 경영하셨는데, 바로 그 하숙집에 우리 아버지가 묵게 된 것이다. 왜 재력 있는 도지사의 아내인 나의 외할머니께서 딸을 따라 동경에 가서 하숙집을 운영하셔야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거기엔 기구한 사연이 있지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시는 동안 아버지의 도시락은 다른 하숙생들보다 알찬 음식들로 채워져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있어 외할머니는 단지 미래의 장모님일 뿐 아니라, 힘든 동경 유학시절을 견디게 해준 가장 큰 은인이셨던 셈이다. 


동경대학을 졸업한 후에 아버지는 잠시 갈등하셨던 것 같다.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하고 전봉란과 결혼식을 올려 오손도손 살 것인지, 아니면 꿈에 그리던 미국이라는 나라로 날아가 눈이 파란 코쟁이들에게서 선진 학문을 배우고 올 것인지. 만약에 나의 어머니 전봉란이 유약하고 의존적인 여성이었다면,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머나먼 나라로 떠나겠다고 하면 울며불며 매달렸거나 결혼만이라도 하고 가라고 우겼을 것이다. 그러나 체육을 전공한 통 큰 여인 전봉란은 남자 친구를 굳게 믿고 씩씩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결국 전봉란에게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남긴 후 다음 목적지인 미국으로 날아가셨다. 내 어머니 전봉란은 유학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와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진주여고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태평양을 오가는 편지로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어머니가 교사로 일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Colorado A&M) 농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학교는 외국인 학생에게는 기숙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 학교는 외국인 유학생 자체가 많지 않아서 학교측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배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해결책을 고심하던 아버지는 급히 학교측에 부탁하여 연구시설에 있는 축사의 천장에 숙소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학교측에서는 판자 몇 개를 가져와서 허름한 다락방을 지어주고 오르내릴 수 있는 사다리를 하나 걸어주었을 뿐이다. 그는 난방시설도 없는 축사 다락방에 매트리스 하나 깔고 기거하면서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다행히 그때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계시던 아버지의 숙부님 중 한 분인 샘 숙부님(내게는 샘 할아버지)이 그 학교로 와서 원예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하셨고, 그분이 콜로라도로 와서 집을 구하자 아버지도 그곳에서 얹혀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천신만고 끝에 1929년 콜로라도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이 평양에 세운 숭실대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리하여 평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마침내 진주에서 내 어머니 전봉란과 결혼식을 올린 후 어머니를 평양으로 데려 오셨다. 어머니는 결혼하신 후 내가 태어나던 해 인 1932년까지 평양의 순안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반가운 맏아들로 태어나다

우리 집의 첫 아이는 인옥 누나였고, 인옥 누나가 두 살 때 내가 태어났다. 유교적인 풍습 속에서 가문의 대를 잇는 남자 아이를 낳는 것이 며느리들의 중대한 임무였던 만큼, 두 번 째 아이이자 맏아들인 나의 탄생은 부모님에게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 당시에는 ‘딸들은 길러봐야 시집 가고 나면 다른 집 식구’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고, 결혼을 하면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 살았으니, 현실적으로도 한번 먼 곳으로 시집 가고 나면 다시 친정에 찾아오는 것이 힘들었다.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여성이었음에도 어머니는 ‘여자는 무조건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나를 낳은 후 거의 2년 터울로 계속 아이를 낳으셨는데 아들을 낳고자 했던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계속해서 딸들만 태어났다. 덕분에 집에는 언제나 어린 아기가 한 명쯤 있었고, 조금 더 자라서 재롱을 떠는 여동생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출산 때마다 방에 흰 천을 걸고 출산 준비를 하던 장면과, 출산 당일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아이를 낳던 장면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유일한 아들인 나를 무척 아끼면서도, 한편 강인하게 키우려고 애쓰셨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조용하고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랐고, 부모님에게 대든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보다는 오히려 인옥 누나가 더 남성적이고 성격이 강했다. 순한 성격에 얼굴마저 여자아이처럼 곱상하게 생긴 나를 보며, 어머니는 누나와 내가 성별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더러운 것을 싫어해서 다른 친구들처럼 진흙탕에서 놀거나 하지 않았다. 비가 오면 신발이 더러워질까 봐 고이 벗어 들고 맨발로 집에 오곤 했는데, 그러다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곤 했다. 


“사내 녀석이 그깟 신발 더러워지는 걸 두려워해서 되겠니? 다른 남자애들처럼 진흙탕에도 마구 구르고, 싸움질도 하고 다니고 그래야지!” 

어머니가 홧김에 던진 신발에 맞아 울고 있으면, 외할머니께서 나를 데려가셔서는 숨겨놓으신 엿이나 사탕을 주시며 달래주셨다. 나와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보다는 우리와 함께 사셨던 외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어머니에게는 응석을 부릴 수 없었지만, 외할머니에게는 달랐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달리 성품이 조용한 편이셨는데, 나는 성품과 외모 모두 어머니보다는 외할머니를 더 닮았다. 어머니는 항상 나에 대한 높은 기대치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지 못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셨다면, 외할머니는 나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칭찬해 주셨다.


나는 혼자서 숟가락질을 할 수 있던 서너 살 무렵부터 아버지와 둘이서 겸상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누나와 여동생들이 한 상에서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여자들의 상에는 없는 귀한 음식이 한두 가지 더 놓인 밥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렸다. 불고기나 조기 구이는 우리 밥상에만 자주 올라오는 반찬이었고, 해물탕이나 닭죽을 끓여도 나와 아버지의 그릇에는 늘 살코기가 더 많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웃지 않고 계시면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사실은 매우 다정하고 장난기가 많은 분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굴비나 갈치의 살을 발라서 내 밥그릇에 올려주셨고, 내가 밥을 남기지 않고 잘 먹으면 칭찬을 하셨다. 아버지는 모락모락 김이 솟아 오르는 흰 쌀밥을 잘 익은 김치로 싸서 드시기를 좋아 하셨는데, 그렇게 밥을 맛있게 먹는 분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2. 중국 단동 시절 단동으로 도망치다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37년, 우리 가족은 갑작스럽게 평양 집을 두고 중국 단동시로 떠나야 했다. 아버지가 교수로 일하던 숭실대학이 문을 닫으면서 아버지도 직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일본 정부는 모든 숭실대 학생들에게 매일 아침 신사참배를 올릴 것을 강요했으나 선교사들과 학교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고, 신사 참배는 곧 우상 숭배를 뜻하는 것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인 십계명을 위반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원래 일제는 1910년 한일합병 후 문화침략 내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와 신사신앙을 강요하기 시작했지만,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독교 사립학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편의를 봐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일제가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위해 각종 탄압을 강화했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숭실대학교의 신사참배 거부를 강력하게 처벌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여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교수들을 재적시켰으며 집과 소유물들을 압수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숭실대학교 교수들은 그 누구에게 호소할 곳도 찾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각자 살 길을 도모해야 했다. 


<다음주에 계속>


39670de3455dff55f97ceec07fba1a6a_1697143360_4938.jpg

(고)명인성 박사 
작가소개 

1932년 평양에서 태어난 명인성 박사는 1948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광업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을 졸업했다. 미국 Raytheon Corporation의 자회사인 Seismograph Service Corporation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털사 대학교(University of Tulsa)에서 석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대한민국 포항의 유전개발 프로젝트와 북한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 중국과 남미 등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민간 외교와 사회사업도 병행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Login

회원가입
이번호 신문보기 더보기

회사소개(KOR) | 광고&상담 문의
KYOCHARO NTV ENTERPRISES LTD.
#327D- 4501 North Road, Burnaby, BC, V3N 4R7, CANADA
TEL. 604-444-4322 (교차로) | 604-420-1088 (TBO) | E-MAIL. vancouver@kyocharogolf.com
Copyright © KYOCHARO NTV ENTERPRISES LTD.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or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팝업레이어 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