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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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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패망, 뒤집힌 운명


힘들게 일본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해 여름 일본이 패전하면서 모든 상황은 바뀌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라디오 뉴스에서 일본이 항복했음을 알리는 소식을 듣고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인옥 누나가 하루 종일 서럽게 울던 일이다. 누나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교육에 세뇌되어, 일본이 전쟁에서 지는 날에는 우리 모두 미국의 압제하에 아프리카 노예들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 가족과 다른 한국인 가족들이 모여 해방을 축하하는 큰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재휘 삼촌도 밧줄을 타고 내려와 당당하게 마당을 활보했다. 하지만 나도 누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우리가 믿었던 세상이 크게 한번 뒤집히는 것을 경험하고 얼떨떨해 했다. 그때 길에서 마주친 일본인 친구들은 나라를 되찾은 우리를 매우 부러워했다. 목숨에 위협을 느끼며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날 준비를 하는 그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들이 안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그들과 나의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1. 다시 평양으로


다 버리고 떠나기


2차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일제의 오랜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우리 가족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칠 틈도 없이 급히 단동시를 떠나야만 했다. 그때까지 일제가 장악했던 단동시를 중국공산당이 압류하게 되자, 전직 일본 간부들을 포함하여 내가 졸업한 소학교의 교장마저 처형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인민법원에서는 그 동안 일본정부와 밀접하게 일해온 한국인 간부들을 한국고등학교 회의장에 모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 정보를 미리 압수한 아버지는 신속히 단동 탈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이 새로 지은 3층집에 이사 와서 딱 3개월을 살았던 시점이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바쳐 지은 그 집을 어떻게 두고 갈 것인가가 큰 문제였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그 집의 명의를 친하게 지내던 중국 건축업자에게로 이전해 놓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잘 간수해주기를 당부했다. 누구보다 그 집에 애착이 많았을 어머니는 금방 마음을 고쳐먹고 씩씩하게 짐을 꾸리기 시작하셨다. 


“다음엔 더 큰 집 지으면 된다. 지을 때는 몰랐는데, 살아보니 좀 작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너희들 각자 독방을 쓰고, 손님들도 넉넉히 묵을 수 있는 집을 지을 날이 올 거야. 여기서 한번 집 지어봤으니 다음 번엔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네.” 


평양을 떠날 때처럼 이번에도 신속히 몇 개의 보따리만 꾸린 다음, 작은 고기잡이 배를 빌려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런데 떠나기로 한 날 아침에 갑자기 아버지가 급히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막아 섰다. 목숨이 일각에 달린 상황에서 아버지의 행동은 내가 봐도 말이 안 되었다.


“지금 이 판에 그 위험한 데를 왜 들어가려고 해요? 그냥 포기하세요!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 혼자 이 식구를 다 어떻게 데리고 평양으로 가요?”


기어코 아버지는 걱정 말라고 하시면서 집을 나섰다. 아버지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뭘 가져올 건지는 끝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나와 어머니는 그게 돈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중요한 문서들이 담긴 자신의 가방을 나에게 맡기셨다. 우리는 선착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져서 길을 떠났다. 아버지가 없으니 내가 남자로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어머니와 동생들이 걱정할까 봐 의젓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선착장에 나타나신 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배를 타셨다. 아버지의 가방을 급히 열어본 건 나였다. 그 속에 든 건 아버지께서 평소에 실험실에서 사용하시던 전자 현미경이었다. 


“현미경이라고 말하면 네 엄마가 안 보내줄 것 같아서…. 이건 이 동네에서는 구하기 힘든 독일제 전자현미경이란 말이야. 그냥 광학 현미경이랑은 차원이 틀려.”


아버지는 현미경에 묻은 먼지를 옷소매로 닦은 후 케이스에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다행히 평양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는 8년 전에 일본 정부에게 강제로 압수당했던 우리 집과 소유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착과 동시에 나는 광성 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게 되었고,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금지되었던 한글을 난생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다. 열 세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내 나라 말을 글로 읽고 쓰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파란 눈의 괴물들, 소련군의 만행


하지만 일제가 물러간 자리에 소련군이 들어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독립된 국가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대국인 미국, 소련, 영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자기들 마음대로 한반도를 38선을 기준으로 양분하여,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북한 지역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감으로써 교육과정에서 영어과목이 빠지고 러시아 과목이 신설되었다. 교육과정의 50% 이상이 군사훈련 및 공산주의 세뇌교육으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우리 반 학생의 10%가 학생당원들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모두 북한 정부의 방침에 따라 학생 당원에 가입해야만 했다. 공산당원증이 없이는 여행을 다닐 수도 없었고, 회의나 운동경기 등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때 갖게 된 공산당원증을 나중에 남한으로 탈출하는 길에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       

1945년 9월, 남녀로 구성된 소련군 연대가 평양에 도착했다. 나는 처음 본 그들의 지저분하고, 가난에 찌든 모습에 매우 실망했다. 하지만 곧 신기하게 생긴 외국인들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며, 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그들은 딱딱하고 검은 이스트 빵을 들고 다니며 끼니때마다 베어먹었고, 트럭이나 지프차에서 잠을 잘 때는 그 커다란 빵을 베개로 활용했다. 그들은 우리가 따라다니거나 놀려도 무슨 뜻인지 몰라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2주가 지나면서부터 야만적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손목시계를 찬 사람들을 보면 막무가내로 시계를 빼앗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무기 생산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소모품이라든지 귀중품은 몇 년 동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계를 보자 환장을 한 탐욕스러운 소련군들은 무력으로 탈취한 손목시계를 마치 훈장처럼 여러 개씩 팔과 가슴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시계 태엽을 감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시계가 멈추면 그냥 버릴 정도로 무식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듣기로는 당시 우리 나라에 온 소련군들 중에는 형무소 복역수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고 한다.  


소련군들은 손목시계를 빼앗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곧이어 수많은 약탈과 폭력을 일삼는 등 비극적이고 잔인 무도한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는 길이었는데, 멀리서 거칠게 달려오는 차 바퀴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러시아 말투의 환호 소리가 함께 들렸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도로 바깥쪽으로 바짝 물러서며 뒤돌아 보았다. 러시아 군인들이 탄 지프차가 빠른 속력으로 코너를 돌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행인들을 두 명이나 치었고, 놀라서 도망치는 소녀를 향해 달려갔다. 지프차에 탄 소련군들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커질수록 신이 나서 낄낄거렸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분노와 무력감에 이를 갈았다. 나에게 힘이 있다면 그들을 당장이라도 응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권 없는 나라의 국민의 목숨은 파리만도 못하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놀이처럼 즐겼다. 나는 학교에 가고 오는 길에 거의 매일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는 주검들을 보았고, 끔찍한 피 냄새를 맡아야 했다. 


소련군이 처음 들어올 때는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규정했고, 마치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줄 평화의 사절인 것처럼 선전했다. 그런데 내 눈으로 목격하고 보니 그들의 주둔이야말로 국가적 비극이었다. 오히려 일제치하에 있을 때보다 한국인의 삶은 더 참혹해졌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밤중에 민간인의 집에 들어가 귀중품을 훔치고, 강간과 살해를 자행했다. 그들이 북한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던 휴지조각 같은 만주 돈을 지폐라고 우기며 물건을 가져가도 가게 주인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소련군이 사법권까지 관할하고 있으니 소련군이 저지른 만행이나 살인사건들을 신고할 곳이 없었다.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지역 경찰들도 이를 소련 사령부에 신고할 방도나 권한이 없었다. 그리하여 평양시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주민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했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은 사자나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이 마을로 들어올 때 쫓아내기 위해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평양 주민들은 놋쇠 그릇들을 막대기로 두드려서 소리를 냄으로써 약탈자의 존재를 알리고,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온 동네 주민들이 힘을 합쳐 그들을 쫓아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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